"나무 하러 다녀올게."
"나무가 저렇게 많은데 또 산에 가게?"
"앞으로 화덕에 쓰려면 저거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서. 비가 오지 않아 요즘 같은 때에 나무를 해 오는 게 나도 덜 힘들거든."
"그럼 같이 가. 나도 도울게."
"네가? 힘들 텐데."
"잔가지라도 주워 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오늘은 식당도 닫는 날이잖아."
"그래. 그렇게 하자."
라온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에는 이미 더운 기운이 실려 있었지만 살랑이는 움직임에 설렘이 느껴졌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은 항상 적막과 함께였다. 간혹 새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도끼질 소리만 나는 숲은 때로는 공포로 다가오기도 했다.
산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폭이 넓은 강은 아니어서 배를 띄우지 않고 돌을 이리저리 맞춰 놓은 다리를 놓았다. 모났던 돌이 반질반질 닳아서 평평해지는 세월 동안 라온은 이 길을 꾸준히 오고 갔다. 혼자서.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한 발을 내딛고 하슬라를 돌아보고 또 한 발을 내딛고 하슬라를 돌아보고. 라온은 그렇게 다리를 모두 건너는 동안 하슬라가 발을 잘 딛는지 미끄러지지는 않는지 조심히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잡고 건너게 해주고 싶었지만 하슬라를 놀라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뒤에서 하슬라의 숨찬 소리가 들리면 라온은 걸음을 늦추고 딴청을 피웠다. 덕분에 하슬라는 쉬엄쉬엄 산을 오를 수 있었다. 험하지 않은 산이었지만 언덕을 올라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떡갈나무가 모여 있는 숲을 지나가 솔잎이 떨어진 곳이 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솔잎이 갈색으로 변했지만, 뾰족한 잎은 그대로였다. 숨을 깊게 들이쉰 하슬라는 솔향기에 취해 살짝 눈을 감았다. 그 바람에 비틀거리다 넘어질 뻔했지만 바로 달려 온 라온이 잡아 준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고마워."
"산길을 걷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 나뭇잎에 미끄러지거나 튀어나온 돌에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 나야 익숙하지만 넌 아니잖아."
"나도 이제 익숙해지면 되지. 산길을 걷는다는 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아. 고요함도 좋고."
"무섭지 않아? 너무 조용하면 난 무섭던데."
"네가 있잖아. 혼자 오면 좀 무서울 것 같긴 하다."
하슬라는 이곳이 정원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요함 속에 편안함이 숨어 있어 이곳에서는 마음껏 자신을 내려놔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란이 곁에 있어서 더 그랬던 것처럼 라온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편안했다. 그는 하슬라의 주위를 맴돌고는 있지만 그뿐이었다. 하슬라의 영역에 허락 없이 침범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조심히 그녀 옆에 있었다.
"혹시…… 예전에 우리 만난 적이 있었을까?"
"왜?"
라온은 뜨끔했다. 하슬라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뭔가 익숙해서.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아. 특히 네 눈 어디에선가 본 것만 같아서."
"아니. 난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도 처음 본 걸."
"그렇겠지?"
라온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슬라가 먼저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하슬라가 당장이라도 도망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슬라도 라온의 대답에 안심했다. 만약 예전의 그 아이라면 자신이 생명의 땅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일 테니. 편안한 분위기에 휩쓸려 물어보지 말아야 할 것을 물어봤다는 듯 자신을 자책했다. 인간처럼 살려고 이곳으로 왔는데 정체가 탄로 나면 안 될테니.
"그만큼 네가 날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이쯤에서 멈추자. 여기가 내가 나무하는 곳이거든."
그러고 보니 군데군데 잘 려나간 나무밑동이 보였다. 라온은 도끼를 꺼내 들었고 이리저리 살피며 나무를 고르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자세히 보던 라온이 두툼한 도낏자루를 쥐고 아래로 내리치자 '쩍'하는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라온은 입을 굳게 다물고 다시 한번 도끼를 내려찍었다. 그의 팔 근육이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이마에서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반짝였고, 옷이 젖어 들고 있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넘어가려 하자 라온은 하슬라부터 찾았다. 다행히 나무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는 안심하고 나무를 쓰러뜨렸다. 라온은 쓰러진 나무를 익숙한 솜씨로 패서 지게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마른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가 숲의 고요를 깨뜨리면서도 묘하게 생동감을 불어넣는 리듬처럼 느껴졌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며 작은 먼지조차 반짝이게 만들었다. 하슬라는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넋이 나가 있었다. 라온의 도끼질 소리조차 숲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소리 같았다. 하슬라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흩어진 잔가지를 그러모았다. 너무 가늘어서도 안 되고 너무 두꺼워서도 안 된다는 라온의 말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나뭇가지를 주울 때마다 손끝에 스치는 나뭇결의 거친 촉감과 흙냄새가 익숙했다.
하슬라는 정원의 기억이 또 끼어들까 싶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무심히 던진 라온의 시선이 하슬라를 향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마주친 눈빛 속에서 어떤 말도 오가지 않은 채 묘한 온기가 번지고 있었다. 하슬라는 괜스레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들을 더듬거리며 시선을 피했지만, 알 수 없는 파동이 일렁이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라온은 그런 하슬라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갓 베어진 나무의 싱그러운 냄새가 깊숙이 들어왔다. 그 냄새 속에는 왠지 모를 설렘까지 함께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옛날 하슬라의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녀와의 공간이 조금은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감정이 고요한 숲을 일렁이게 했다.
내려가는 길 역시 라온이 앞장섰다. 긴 나뭇가지를 꺾어 하슬라에게 건네고 자신도 하나를 골라 지팡이 삼았다. 라온은 한 발 한 발 신중히 내딛었다. 무거운 나무를 지고 걷는 길이 덩치 좋은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하슬라가 내려가는 길에 미끄러질까 걱정이 되었다. 산을 오르는 것도 내려가는 것도 그녀에게는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라온은 마음만큼은 평지를 걷는 것보다 가벼웠다. 뒤를 돌아 하슬라를 바라보다 넘어질 뻔하고, 그럴 때마다 그녀가 걱정해 주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하슬라의 붉어진 두 뺨을 보면서 라온은 어쩌면 하슬라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