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 이렇게 만든다는 말이지?"
매디는 밀가루에 따뜻한 물을 붓고 있는 하슬라를 향해 짝다리를 짚으며 말했다. 눈대중으로 요리하던 매디는 다양한 크기의 그릇을 가져와서 하나하나 계량하며 재료를 넣고 있는 하슬라가 답답해지던 참이었다. "배고픈 사람 어디 속 터져서 기다릴 수나 있겠니?"
"빵은 발효도 해야 해서 오래 걸리지만 머핀 같은 건 금방 만들 수 있어요. 오늘은 오래 걸리는 빵을 미리 만들어보려고 하는 거예요."
"알았으니 계속 해 봐."
하슬라는 하나로 뭉쳐진 반죽을 계속해서 치대었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아파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때 불쑥 나타난 굵은 구릿빛 팔이 반죽을 낚아챘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라온은 하슬라를 향해 씩 웃으며 힘 있게 반죽을 치대었다. 확실히 하슬라가 하는 것보다는 빠르게 반죽이 매끄러워지고 있었다.
"잘한다. 농사일보다 이게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은데."
"내가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어련하시겠어!"
매디는 라온의 등을 찰싹 때렸다. 언제부터인가 제 일을 팽개쳐놓고 하슬라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밭에 물은 주고 온 거야? 그냥 들어온 거 아니겠지?"
"아니에요. 주긴 줬는데. 사실 이제 강도 많이 말라서 충분히 주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아직 먹고 살 만큼은 되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하슬라는 라온에게서 반죽을 가져와 적당한 크기로 분할하고는 젖은 수건을 올려놓았다.
"이대로 두배쯤 부풀어 오르면 화덕으로 가져가서 구울 게예요."
"그럼 화덕에 불을 떼 겠네. 내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마."
물이 모자란 상태인데도 뭐가 그리 신났는지 뛰어나가는 라온을 보며 매디는 한숨을 지었다.
"비가 내려야 할 텐데. 이러다가 과일들도 다 떨어져 버리겠어. 작년에 풍년이 들어 밀가루가 넉넉해서 다행이지만 이러다 사람들 먹을 물까지 말라버리면 큰일인데."
매디의 말에 하슬라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집을 떠나온 지도 2주가 지나있었다. 그전부터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하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정말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비를 내리지 않으시는 걸까. 하슬라는 이곳에서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하는 만큼 불안해졌다.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이 생기기를 바라고 있지만 쨍하고 쾌청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라온은 굵은 나무를 쪼개서 화덕 아궁이에 쌓았다. 그리고 하슬라가 주워 온 작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금방 불이 옮겨붙었다. 하슬라는 둥근 화덕 지붕에 손을 살짝살짝 대가며 온도를 체크했다. 모두 제나에게 배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온전히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하는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다. 그녀는 제발 빵이 제대로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매디를 위해서도 맛있는 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열이 어느 정도 오르고 반죽도 적당히 부풀었다 싶었을 때 화덕에 반죽을 넣고 입구를 닫아버렸다. 이제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반죽을 하고 발효를 하는 과정에 비해 굽는 시간은 찰나와도 같아서 화덕 앞을 떠나 있어서는 안 됐다. 하슬라는 오로지 감으로 시간을 체크하고 빵이 부풀어 오르는 모양을 지켜보다 꺼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오히려 성안에 있을 때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빵이 나왔다. 매디와 라온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반신반의했던 매디는 안심하는 눈빛으로 하슬라는 쳐다보면서 빵을 입어 넣었다. 역시나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자 됐다. 이제 이걸 한번 팔아보자. 하슬라 너는 그 머핀인지 뭔지도 한번 만들어봐."
"네!"
하슬라는 라온에게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다 달라고 부탁하고 남는 과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지난번에 먹은 블루베리였으면 했지만 대답은 '없다'였다. 일단은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머핀을 만들기로 했다. 녹인 버터에 설탕을 넣고 상아색으로 변하자, 밀가루를 넣어 섞었다. 이번에도 매디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이렇게 간단한 걸로 맛있는 빵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슬라는 마법을 부렸다. 김이 솔솔나는 머핀을 반으로 나누자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가게에 가득 찼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 게 지겨워 식당에 발길을 끊었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왔다.
하슬라는 다양한 빵을 만들어 내었고, 그럴 때마다 매디와 라온의 찬사를 받았다. 시장에 나가면 빵을 파는 가게는 많았지만, 하슬라처럼 다양하고 부드러운 빵을 만들어내는 곳은 없었다. 소문을 듣고 모여든 손님들로 가게는 항상 가득 차 있었다. 매디는 이제 다른 음식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그날그날 있는 재료로 끓인 수프나 스튜만 있으면 하슬라가 만든 빵에 곁들어 내었다. 어느새 수프나 스튜보다는 빵이 주메뉴가 될 정도였다.
하슬라는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뿌듯했다. 자신을 거두어준 매디나 도와준 라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도 기뻤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하슬라. 덕분에 이제 걱정을 덜게 되었어."
"저를 받아주신 것에 대해 보답할 수 있게 돼서 너무 좋아요."
"보답받으려고 너를 받아준 건 아니란다."
매디는 식탁 의자를 끌어다 하슬라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하슬라는 옆자리에 앉아 매디의 거친 손을 바라보았다.
"가게 앞에서 자는 저를 내쫓지 않고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에요. 제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셨잖아요. 제가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일이었어요. 무엇으로든 꼭 보답하고 싶었어요. 식당에서 일을 하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어요."
"식당에 손이 필요하면 직원을 고용했을 거야. 너를 여기서 일하게 한 건 그냥 받아주면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어. 가게 앞에 쓰러져 있던 네 표정이 꼭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 하던 사람같았거든."
그랬었구나. 그날 하슬라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신없이 거리를 헤매는 것뿐이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 와중에도 잠이 오고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드는 게 신기했었다.
라온은 생각에 젖어 있는 하슬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분명 생명의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으니 이곳으로 온 것일 텐데 라온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가끔 이렇게 하슬라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것같이 멍하니 생각에 젖어 있을 때마다 그는 불안했다. 하슬라가 그곳에서 가슴 아픈 일을 겪고 도망친 것일까 봐. 그런 생각이 들수록 라온은 그녀를 생명의 땅으로 다시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제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군다나 하슬라는 지금 이 생활을 너무도 좋아하고 있었다. 나날이 그녀의 얼굴에 생기에 돋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보석을 빼앗아 가던 남자를 잡아끌던 두려움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다. 라온은 지금의 하슬라를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었다.
"자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들어가서 쉬자. 손님이 많았는데도 힘들지 않은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구나."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은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아요."
"뭐라고!"
결국 매디는 오랜만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라온은 하슬라가 매디를 웃게 만들어 준 것만 같았다. 매디만 하슬라를 구해준 것이 아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와 손님과의 말싸움에 지쳐있던 매디를 하슬라도 구해주었다. 항상 일에 찌들어 있어 신경질적이던 매디가 요즘따라 손님들 대하는 태도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라온은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했다. 단 하나 정말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행복한 순간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이건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라온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런데 정말 과일을 구할 수는 없는 걸까? 과일을 넣을 수 있다면 더 다양한 빵을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좋으련만. 사과나 복숭아는 열려있지만, 아직 익지 않았고, 블루베리는 이제 다 떨어졌는데. 딸기 줄기가 다 말라버려서 그것도 소용없고."
"아! 있어요. 딸기 하니까 생각났어요. 숲에 산딸기가 자라는 곳이 있어요. 그거면 되지 않을까? 하슬라."
"좋아. 산딸기 타르트를 만들어도 되고 다른 빵에 넣어도 맛있어. 식당 쉬는 날 가는 건 어때?"
"그래. 나무를 하러 가는 겸사겸사 가면 되겠다."
라온은 하슬라와 나무하러 가던 날이 떠올라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날의 기분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