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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42화

by 백서향

"이 여자는 뭐야?"


"뭐긴 뭐야?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이지 보면 몰라?"


한창 바쁜 점심시간 가끔 들르던 사내 하나가 하슬라를 가리키며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쁜데. 드디어 얼굴로 손님 좀 끌어보려고 한 건가?"


"입 닥치고 먹기나 해. 쫓겨나기 싫으면! 그리고 너, 손님들한테 웃지마."


매디는 음식을 나르고 있는 하슬라의 뒤통수에 대고 큰소리를 내었다. 그동안 남자 손님들이 하슬라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기는 했지만, 풍성한 보랏빛 머리카락이 찰랑일 때마다 시선이 가기 마련이었다. 큰 눈망울에 상기되어 있는 두 뺨 위로 웃음이라도 지으려면 식당 안의 공기가 일순간에 멈춘 것처럼 보였다.


"매일 칙칙한 얼굴들만 보다가 꽃 같은 아가씨를 보니 내 마음이 다 싱숭생숭해지는걸. 나만 그런 건 아닌걸. 여기 있는 사람 모두 그런다는 것에 내가 가지고 있는 돈 모두를 걸지."


매디는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내는 분명히 매디의 날 선 반응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매디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내는 조금 더 나아가보기로 했다. 하슬라가 그 옆을 지나고 있을 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버린 것이다.


"악! 놓으세요."


하슬라가 힘을 주어 팔을 빼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씩 웃으며 하슬라와 매디를 번갈아 보던 사내는 오히려 하슬라의 팔을 잡아끌었고 그 힘에 하슬라의 몸이 사내 쪽으로 넘어졌다.


"아이코. 이런. 많이 힘들었나 보네. 여기서 쉬어가게?"


사내의 농담에 가게 안에 있는 남자들이 매디의 눈치를 보면서도 같이 웃었다.


"그만하시죠!"


어느새인가 나타난 라온이 하슬라를 일으켜 주고는 제 뒤로 숨겼다. 큰 주걱을 가지고 주방에서 나오던 매디가 그 자리에 멈추고는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난친 거 가지고 왜 그래? 그렇게 노려보면 무섭잖아."


사내는 몸을 웅크리면서도 음흉한 얼굴로 하슬라를 쳐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라온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전에도 그랬지만 하슬라는 건드리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라온은 이번에도 주먹을 날렸다. 넘어지는 사내가 식탁을 잡는 바람에 식기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음식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라온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감히, 하슬라를!"


하지만 두 번째 주먹을 날리기 전에 매디가 라온을 막아섰다. 라온은 매디까지 밀치며 사내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매디가 그의 어깨를 있는 힘껏 꽉 쥐었다.


"그만하면 됐어. 그만해."


라온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놓으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그도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식당 안에는 다른 손님들도 많이 있었다.


"한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식당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라온이 끝까지 쫓아가서 곤죽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어. 봐서 알겠지만 처신들 잘하라고 ."


매디는 나머지 손님들한테 일침을 놓은 후 식기와 음식물을 정리했다. 하슬라도 도우려고 했지만, 라온이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그게 왜 너 때문인데? 저놈이 그런 거지."


"어쨌든 나 때문에 분란이 일어난 거잖아. 애초에 내가 없었으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었고. 너랑 사장님도 화나지 않았을 테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약해 보이니까 함부로 하는 놈들이 문제인 거지."


"화 많이 났어?"


"그렇게 말하지 마. 그 말 때문에 더 화가 나니까."


하슬라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인간 세상에 왔어도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도 분란은 일어났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에 항상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애초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아이. 하슬라도 오늘도 그런 생각에 마음이 시렸다.


"그건 라온 말이 맞아."


어느새 다가온 매디가 하슬라의 등을 토닥여줬다.


"네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저놈이 잘못한 일이고 그걸 우리가 나서서 해결했으면 그만인 일이야. 고맙다고 하고 끝내면 돼. 미안하다는 말은 저놈이 해야 하는 거지 네가 할 말은 아닌 거야. 세상을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을 텐데 그럴 때마다 미안하다고 하면 사람 우습게 되는 거 한순간이다. 그러니 이번 일은 이쯤에서 그만하자."


"네, 고맙습니다."


하슬라는 고개를 숙이다 말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말에 제나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언제가 제 편이 되어 준 사람.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이 둘이나 더 생겨버렸다. 하슬라는 마음이 잔잔히 가라앉는 기분었다. 시린 마음이 땅밑까지 꺼지지 않고 제 곁을 잔잔히 맴돌고 있었다. 정원에서 불던 그 포근했던 바람이 여기서도 불고 있는 것 같았다.


살랑이는 바람이 하슬라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흩날렸다. 하슬라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하다 말고 하나로 묶어 올려보았다.


"저 머리카락 자를래요. 짧게 잘라주세요."


뒤돌아 가려던 매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온을 쳐다보았다. 지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왜? 아까 그놈 때문에?"


"그거 머리카락 좀 자른다고 못생겨질 것 같진 않은데."


"아니에요. 일하 데 거추장스러워서 그래요. 음식에 머리카락 빠질까 봐 신경 쓰이기도 하고요."


"그래, 그럼. 라온 가위 가져와."


"지금 여기서요?"


"그럼 날이라도 잡아서 의식 치르고 자를까?"


"하슬라,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예쁜 머리 너무 아까운데."


"라온이 이렇게 나오는 거 보니 자르는 게 낫겠다."


매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슬라의 머리카락을 한 번에 잘라버렸다. 풍성하고 윤기가 흘렀던 보랏빛 머리카락은 잘리자, 그 빛을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꼭 비를 맞지 않아 말라버린 토마토 줄기 같았다. 하슬라는 머리카락을 시들어진 농작물을 쌓아 놓은 곳에 망설이지 않고 던져 버렸다.


라온이 저녁이 되면 이곳에 불을 놓을 것이다. 그러면 한순간에 타서 재가 되어버리겠지. 하슬라는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성안에서는 왜 단 한 번도 머리카락을 자를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짧아진 머리카락이 신기한듯이 계속해서 만지고 또 만졌다. 머리가 가벼워져 움직이는 데 훨씬 효율적이었다.


라온이 긴머리카락을 아쉽다는 듯이 보고 또 보았다. 머리카락이야 또 자랄 테지.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보라색 불빛을 만들어내는 하슬라를 라온은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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