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면 매디는 시내로 나가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집으로 갔다. 만약 하슬라가 없었다면 라온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온은 하슬라는 집 안에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차라리 들짐승들이 들어오는 것은 나았다. 농작물이 망가지긴 하겠지만 문을 열고 나오지만 않으면 되니까. 하지만 낮에 있던 사건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됐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매디와 친하고 점잖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류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잘 자.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문 열어볼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고 그냥 죽은 듯이 있어."
라온은 하슬라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거듭 당부했다. 보석을 빼앗으려 한 사내도 그렇고, 오늘 하슬라를 희롱한 사내도 그렇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럴게. 고마워. 그리고 미……."
"미안하다는 말 안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아니, 네 방 뺏어서 미안하다고. 불편한 식당에서 웅크리고 자야 하잖아."
"전에도 말했듯이 더한 데서도 자봤으니 그 말은 인제 그만하자. 빨리 자. 내일도 열심히 일해야 하잖아."
라온은 일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한껏 웃어보였다. 그 웃음을 본 하슬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넌 일하는 게 좋아? 일 할때마다 기분이 좋아보여서."
"그럼, 일을 하고 그 대가를 얻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야. 갈 데도 잘 데도 없는 게 죽는 것보다 괴로울 때가 있었어. 그래서 난 지금이 너무 행복해."
"그렇구나. 사장님 같은 가족이 있어서 더 그런 거겠지?"
"아 참. 어머니가 내 친 엄마는 아니셔. 극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나를 받아주신 분이거든. 그때 나를 받아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난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몰라."
하슬라는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피붙이보다 매디와 라온이 오히려 더 가족같았다. 퉁명스럽게 말하는 매디는 라온을 볼 때면 항상 웃음을 띠고 있었고 잔소리를 듣는 라온도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눈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난 아버지를 볼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단 한 번도 활짝 웃어 보였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바론도 자신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이고는 있었지만 하에라를 보는 눈빛으로 바라봐 준 적은 없었다.
"좋겠다."
하슬라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흘렸다. 라온은 어색한 분위기를 어찌해야할지 몰라 살며시 뒷걸음질 쳤다.
"무슨 일 있으면 소리 질러. 내가 듣고 바로 달려올 테니까."
"그럴게. 잘 자."
라온은 아쉬운 듯 방문을 천천히 닫으며 하슬라의 짧아진 머리카락에서 시선을 놓지 않았다.
하슬라는 방을 죽 훑어보았다. 그동안 남의 방이라는 생각에 구석구석 살펴볼 생각도 들지 않았었는데도 오늘은 왠지 이 공간이 익숙해 보였다. 책상과 침대, 그리고 옷가지가 걸려있는 작은 장롱이 전부였다. 책상에는 책이 꽂혀있긴 했지만 누렇게 변해버린 종이가 오래된 것 같았다. 하슬라는 그중 하나를 꺼내어 펼쳐보았다. 이리저리 삐뚤어지게 쓰인 글씨들이 줄에서 비껴나 있었다.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꼭 예전에 수학 문제를 풀기 싫어했던 자신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숙제를 대신해 준 아란이 기억의 끄트머리에 끌려나왔다. 언제까지 기억에, 아픈 마음에 끌려다녀야 하는 걸까. 하슬라는 그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 다른 책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어린아이가 쓴 듯한 공책이었다. 작은 종이였지만 한가득 공부하기 싫다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농사를 지어야 할 사람이 왜 공부를 해야 하냐는 원성을 토해 놓은 글이었다. 하슬라는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라온을 떠올렸다. 선한 눈빛에 부드러운 미소. 굵은 얼굴선과는 대조를 이루는 그 눈을 어디에선가 본 듯하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혹시 그 아이가 아닐까?'
하지만 하슬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의 저편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도 떠오를까 말까 한 기억이었다. 그 아이가 맞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슬라는 그대로 침대 위로 누워버렸다. 푹신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제 몸을 지탱해 주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긴 했지만 이정도면 감지덕지였다. 라온의 말대로 더한 데서도 자보았는데 이 정도면 감사했다.
이른 아침 부지런히 입을 놀리는 새소리 덕분에 하슬라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따라 직박구리가 더 신나게 노래하고 있었다.
대충 세수하고 짧은 머리를 끌어모아 바싹 묶은 하슬라는 바로 식당으로 건너가 보았다. 라온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매디는 나오기 전이었다. 하슬라는 식당을 이리저리 뒤져 밀가루와 계란을 찾아내었다. 조금이긴 하지만 버터도 있었다. 그녀는 오늘만큼은 아침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팬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유가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재료들을 한 데 섞은 후 버터를 녹인 프라이팬에 동그랗게 팬케이크를 부치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고소한 냄새가 식당 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하슬라의 마음도 덩달아 부풀어 올랐다.
"이게 무슨 냄새야?"
"오셨어요? 아침 안 드셨죠?"
"네가 만든 거야?"
어느새인가 나타난 라온이 하슬라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응. 과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싱싱하진 않겠지만 블루베리랑 토마토가 좀 남아있을 거야. 기다려봐."
식탁 위에는 팬케이크와 과일들이 차려졌다. 하슬라는 이들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어디 먹어볼까? 와, 이거 진짜 맛있는데, 살살 녹아. 어쩜 이렇게 부드럽지?"
매디의 칭찬은 진심인 것 같았다. 아침을 준비해 준 하슬라에 대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어디서 배운 거야? 아니면……."
"전에 빵 만드는 일을 했었어요. 요리는 못해도 디저트는 잘 만들어요."
"그래? 그럼 이걸 만들어서 팔아보는 건 어때?"
"여기서요?"
"그렇지 않아도 가뭄에 계속돼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거든. 작년에 수확해서 저장해 놓았던 밀가루는 넉넉히 있고, 닭들이 계란은 계속 낳아줄 것이니 재료 걱정은 없을 것 같아. 아무래도 당분간은 신선한 채소를 얻는 건 힘들 테니."
라온은 괜히 움찔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임무가 생각났다. 시간이 자꾸 가고 있었다. 라온은 목이 메어 물을 연거푸 들이켰다.
"하지만 빵을 만들려면 화덕이 필요해요. 여기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만들어 줄 사람이 있으니."
매디는 대장장이를 생각했다. 그라면 매디의 말에 한걸음에 달려와 쓸만한 화덕을 만들어 줄 테니.
매디와 대장장이는 겉보기에는 여전히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 먼 훗날 또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지금은 그편이 나았다. 각자 생활을 유지하며 긴장감있는 관계가 그들을 더욱 애틋하고 끈끈하게 이어주는 듯했다.
식당 밖 지붕 아래 작은 화덕이 완성되었다. 성안에 있던 화덕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모양새였지만 쓰임새는 같았다. 장작을 넣는 네모난 화구 위로 편편한 돌이 놓였고 그 위로 돔 모양의 지붕이 감쌌다. 연기가 빠져나가게 하는 굴뚝이 가게와는 반대편으로 솟아 있었다. 붉은색 타일로 장식한 화덕 안에서는 시뻘건 불꽃이 이글대고 있었다. 하슬라는 대장장이를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며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빵을 만들면 꼭 가져다드리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매디는 언제나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지만, 이번에는 쑥쓰러운 듯 고맙다는 말을 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