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국을 생각하며 쓴 책입니다. 한국을 생각하며 썼지만, 집필 과정이 이루어진 물리적 공간은 어디까지나 뉴욕입니다. 더 정확히는 맨해튼에 위치한 제 조그마한 스튜디오에서 대부분의 글을 썼습니다. 평일에는 주로 퇴근 후의 늦은 밤에 원고를 썼고, 주말에는 시간이 비는 아침 시간을 활용했습니다. 밤이든 아침이든 힘든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별은 대단히 민감하고도 복잡한 주제입니다. 그렇다 보니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난 뒤 허리를 쭉 펼 때마다 척추에서 '바사삭'하고 마치 오래된 바게트를 쪼갤 때 나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났습니다. 멘탈은 그보다도 훨씬 더 자주 깨졌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 책의 문장들이 제 척추와 멘탈이 깨지며 만들어낸 부스러기들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보잘것없는 부스러기들을 긁어모으니 어느새 책으로 엮을 정도의 분량이 됐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를 하기 위해서이지, 이 책이 태산에 비교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태산을 들먹이자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책에 대한 걱정거리야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역시나 가장 큰 걱정거리는 '과연 내가 차별에 대한 책을 쓸 자격이 있나?'에 대한 의문입니다. 이 의문은 마치 어둠 속에서 좀처럼 잡히지 않는 모기처럼,책을 쓰는 내내 절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설득의 요소 중에는 '에토스(Ethos)'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발전시킨 수사학에 나오는 기본 개념인데, 쉽게 말해 글쓴이의 자격이나 공신력에 해당합니다. 아리스토렐레스는 설득의 요소 중에서도 이 에토스라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타인을 설득하는 데 있어 말이나 글의 '내용'보다는 '전달자'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의견인 게,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글쓴이를 신뢰하고 믿을 때에만 그 사람의 글이나 말에 귀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전문성은 보통 신뢰의 좋은 근거가 됩니다. 이를테면 리만 가설에 대한 설명은 명망 있는 수학자가 해야 권위가 서고, 다중우주론에 대한 해설은 그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물리학자가 해야 믿음이 가는 식입니다. 때로는 글쓴이가 살아온 삶 자체가 그의 말과 글에 힘을 실어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것은 법정스님이 실제로 그런 삶을 실천하는 분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에토스가 실리지 않은 말이나 글은 그 생명력을 잃기 마련입니다. '공정'을 부르짖으면서 뒤에서는 '부정'을 저지르는 정치인, '성평등'을 외치면서 결국은 '성추행'을 저지르고 마는 인권 운동가, 또 '권리'를 강조하면서 실상은 '권력'을 탐했던 인권 단체장의 말과 글의 의미가 얼마나 빠르게 퇴색되었는지를 떠올려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렇듯 자격을 잃은 말은 그저 공허한 울림일 뿐이고, 자격이 부재한 글은 그저 무의미한 글자의 나열이 되기 마련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중에 울림이 없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취해 술주정하듯 글을 쏟아내다가도, 때론 글 쓰는 걸 잠시 멈추고 제가 과연 차별에 대한 글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는 했습니다.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물론 저는 현재 차별금지법과 관련된 업무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전문성은 있다고 할 수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직업적인 부분이고, 그마저도 경력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이것만으로 제가 차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올 일이 크게 없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고, 사회학적으로도 남자입니다. 뚜렷한 신체적 장애나 정신적 장애도 없을뿐더러, 핍박의 대상이 되는 종교를 믿고 있지도 않습니다. 자신 있게 내세울만한 외모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족보에 시조가 당나라 분이라고는 쓰여있기는 한데, 그렇다고제가 이민자 출신이라고 우기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편도 아닙니다. 큰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직업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저는 이성애자입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제가 차별에 대해 개인적인 사연을 갖고 있거나 피 끓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을 만한 이유는 없어 보였습니다.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글을 쓰면서 설득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에토스가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이건 뭔가 시작부터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회의감이 먹물처럼 번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잠시 글 쓰는 걸 멈추고 뉴욕의 거리로 나갔습니다. 뉴욕에서는 집 밖에 나와 몇 블락만 걸어도 마치 세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듭니다. 제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는 신선한 향료와 중동 요리 냄새가 풍기는 근사한 식료품 가게가 있는데, 그곳을 지나서 코너를 돌면 유태인식 델리 가게가 나옵니. 식당 안은 늘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멕시코계 미국인이 한데 모여 선조들의 언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해가며 이곳에서 식사를 합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한국산 식료품을 살 수 있는 아시아 마켓과 대만식 버블티 가게도 나옵니다. 버블티 가게 내부에선 최신 케이팝의 전자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고, 그 안에선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가사도 모르는 케이팝의 빠른 비트에 고개를 까딱이며 타피오카가 잔뜩 들어간 음료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건너에 위치한 헝가리식 카페에는 커피와 제르보를 시켜놓고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거리는 대형견을 산책시키는 사람들이나 서로의 손을 맞잡고 걸어 다니는 젊은 커플들로 북적입니다. 인종이 다른 커플도, 성별이 같은 커플도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파의 바다에 섞여 들어가 도시에 생명력을 더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 무리에 섞여 하릴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불안감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곤 했습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사람들 틈에 섞여 걸을 때만큼은 마치 제가 알 수 없는 거대한 맥박의 일부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교차하는 두 줄의 직선처럼, 한 지점에서 잠시 교차하고 그대로 멀어져 앞으로다시는보지 못할 사람들 틈에서 이런 일체감을 느꼈다는 게 제가 생각해도 우습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한동안 걷다가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저는 다시 글을 쓸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도, 거리의 젊은 커플들도, 대형견도, 버블티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부스러기도, 모두 원자가 기본 구조라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의 수는 온 우주에 존재하는 별의 수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러니 약 80억 명의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지구엔 무려 80억 개의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우주의 모든 것을구성하고 있는 원자가 대부분 비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과학 시간에 배웠듯이,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건 원자핵과 전자입니다. 만약 책 한권이 원자핵이라고 가정한다면, 전자는 대충 우리가 사는 도시나 지역 상공에 떠다니는 먼지 한 알 정도의 크기밖에 안 됩니다. 원자핵과 전자를 다 합쳐봤자, 무언가 '존재'한다고 할만한 것은 원자의 전체 크기의 1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것이죠. 그 공간을 제외한 원자의 대부분인 99.999%는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이 반쯤 든 컵을 보고 낙관적인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하고, 비관적인 사람은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말한다는 이야기는 아마 들어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물이 반이라도 차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99.999%가 비어있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이 그냥 비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원자는 우주만큼이나 텅 비어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역시 대부분이 빈 공간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인문학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비어있는 것은 모두 '가능성'입니다.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광활한 하늘처럼, 혹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한 장의 백지처럼, 우리 모두는 비어있기에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 대한 몇몇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저 사람은 게으를 거야', '저 사람은 의지가 약할 거야', '저 사람은 능력이 부족할 거야', '저 사람은 사생활이 문란할 거야'와 같은 피상적인 잣대들을 들이대고는 합니다. 가능성으로 남아야 할 공간에는 멋대로 사회적으로 습득한 편견과 추측을 가득 채워 넣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는 눈과 세상을 이해하는 눈을 가졌다고 우쭐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건 이해가 아니라 오해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부모 자식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부부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확률은 아마 10만 분의 1도 안될 테죠.그러니 본인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려는 짓은 애당초에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사회적 통합은 꿈도 꾸지 말자는 비관적인 소리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성별, 국적, 피부색, 성 정체성과 같은 경계를 넘어 우리를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것은 이해가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한데 묶어주는 힘은 이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모든 차이를 포용할 수 있고, 모든 비용과합리적인 계산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야 말로 우리의 사회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특이점입니다. 그 증거로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온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꼭 이타적이고 박애주의적인 사랑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랑도 사회를 바꿀 수 있습니다. 저만 봐도 그렇습니다. 차별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보니 몇몇 사람들은 제가 사명감에 불타는 투사라고 생각하거나 이타심이 넘치는 박애주의자라고 오해하고는 하는데, 저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늘 안정을 추구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사는 세상이 안정적이고 상식적이기를 바랍니다. 제가 혹시 미래에 사고를 당해 장애가 생기더라도, 최대한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고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제 아이가 혹시 동성에 끌린다고 고백하더라도, 아이의 사랑을 기쁘게 응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저나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혐오와 차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혼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좋든 싫든 사람들 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노숙인이나 장애인이나 이주노동자나 성전환자가 극단적인 고통을 받는 사회에서, 국민의 대다수가 피해의식과 좌절감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계층 어디에서나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환경에서, 혼자만 초연하고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온 세상이 울고 있는데, 그 비극이 저만 피해 갈 리도 없습니다.
안정을 추구하고 이기적이어서 그런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저는 끊임없이 망설였습니다. 어설픈 미완의 책을 세상에 내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괜히 민감한 문제를 건드려 비난을 받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완성시키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었습니다. 자꾸 무언가 핑곗거리를 찾았습니다. 자료 조사가 더 필요하다느니, 문장과 논리를 더 가다듬어야 한다느니, 나는 자격이 부족하다느니.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망설이는 사이, 비극은 착실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우리 사회를 조금씩 잠식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에만 누군가는 차별 때문에 학업을 포기했고,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약 80억 명의 인간과 무려 80억 개의 우주가 존재하는 세상이니, 제가 모르고 지나쳤거나 놓치고 있는 비극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이 책이 제가 만족할 만큼, 그러니까99.999% 준비되는 순간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어쩌면 우리 사회도 저처럼 준비가 덜 됐다며, 또 사회적 합의가 덜 되었다며 차별과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를 미루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래서 비록 호소력도 부족하고 논리도 허술하지만, 지금은 일단 차별에 대한 논의에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보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치 우주비행사가 달 표면에 첫 발에 내딛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이 책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말했습니다. 제 시기가 온 사상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고. 저는 지금 그 시기가 우리에게도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이미충분히 다양성과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는 삶을 정해진 답이 존재하는 '방정식'이 아닌,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고 믿습니다.이제 우리 모두가 차별과 차별금지법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믿습니다.
이 책이 차별과 차별금지법에 대한 의미 있는 해답을 제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역할은 '마침표'가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으로 끝이 없이 이어질 차별에 대한 대화에 있어 이 책이 '물음표'와 같은 역할은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이 책이 차별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험난한여정에, 조금이라도 힘을보탤 수 있기를바랍니다.그것이 고작 부스러기만 한작은 도움일지라도. 아니, 단 10만 분의 1의 가능성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