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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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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Feb 02. 2020

해외 회사에서 시니어 디자이너로 2년

나의 기록


겨터파크 개장과 함께 무더웠던 제작년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날 최종면접을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10분도 되지 않아 디자인 리더에서 메일을 받았다. 아쉽지만 함께하지 못할 것 같다고 내가 최종 과제로 한 디자인은 자신이 지금까지 본 디자인중에 최고였지만 High Fidelity conversation 중요한 시니어롤로는 부족하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나에게 마지막 최종 면접의 기회를  리더에서 너무 고마웠다고 좋은 경험이었다고 답메일 보냈었다. 이후 6개월  계속 연락을 이어갔던 팀리더와 커피한잔하며 일상을 나누다 오퍼를 받고 나는 그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시니어 디자인너로 팀원들과 점심도 같이 먹고 이번 Q3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지 논의하는 팀원이되었다.


초기에 면접기회는 신기하게 많이 있었다. 몇몇 곳은 이력서를 넣은 바로 다음날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다. 아마도 원어민이었던 남편이 내 글을 번역해서 써준 자기소개서가 너무 완벽했나보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난 자소서에 들어간 몇몇 단어가 뭔지 모르겠고 발음도 어렵다.) 면접 이후에는 100% 불합격 "we won’t be proceeding to the next stage" 이메일뿐이었다. 한 8번째였나 그때는 답 메일에 부정적인 won't 단어만 보였고 읽지도 않고 불합격이라는 것을 알았다. won't  단어로 메일함에서 검색하면 다양한 회사에서 온 불합격 메일이 검색된다.


면접을 보기 전 숨막히고 떨리는 마음과 면접 이후 진이 빠져 하루종일 잠만 해야 했던 그 긴장이 순간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한국말이라면 임기응변이라도 가능했겠지만 면접 중에는 그들의 숨은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말하는 단어조차 나는 알수가 없었다. 화상 면접때는 모니터 테두리로 할 말들을 포스트잇으로 붙혀두거나 화면 한쪽에 메모장을 켜놓고 질문중에 단어 하나라도 맞는게 있으면 그냥 비슷한 부분들을 쉬지 않고 몇 문장되는 것을 책 읽듯 읽었다. A를 질문했는데 나는 B도 아닌 다른 세상 대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멜버른에 브런치를 둔 뉴질랜드 회사랑 면접볼땐 아침 7시 화상 면접인 적도 있었고 멜버른에서 가장 힙한 브랜드랑 면접볼때는 적성 검사와 아이큐 검사에 합격하고 나서야 실무자 면접을 보기도 했었다. 한국분이 디자인 리더로 있던 정말 유명한 회사와 면접에서는 중요한 부분을 그 분이 한국말로 여쭈어보기도 했다. 또 다른 곳에선 나랑 최종면접까지 같이 간 분이 내가 아는 지인이었고 나는 떨어지고 그 분이 입사가 된 적도 있었다. 한 HR담당자는 메일로 불합격을 얘기해도 되는데 내가 너무 열심히 준비했다는 것을 아는지 그는 퇴근길 나에게 전화하여 불합격 소식을 알려주었다. 정말 미안하다며 메일로 얘기하는 것보다 전화가 좋을 것 같아 전화했다고.. 이력서를 넣은 곳 중 한 80군대는 아예 답장도 없었다. 불합격 소식은 다양한 방면으로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내 자신을 내가 위로 하다가도 왜 내가 실패하는지 계속 내 탓을 하다가 그 시간들이 나를 돌려깍기해 자존감을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아침에 이불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무기력까지 왔었다.


한국말이었으면 쉬웠을까, 내가 영주권이라도 있으면 편했을까, 내가 여기 대학이라도 다시 다녀야 하나, 나는 왜 굳이 회사를 다니려고 하는건지, 그냥 프리랜서로 디자인하면 되지 않을까 하며 몇달에 거친 구직활동의 끝에 나는 내가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라는 결론에 이르러 나는 프리랜서 이력서를 다시 만들어 여기저기 단기직 프로젝트 프리랜서로 디자인 에이젼시에 메일들을 보냈다. 몇몇 에이젼시와 단기로 디자인을 했고 그것이 호주에서 일한 경험과 경력이 되었다. 지금 쓰면서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 최선을 다 했던 것 같다. 이것이 가능하게 만든 사람은 남편인데 내가 주저앉으면 다시 일으켜세워 할 수 있다고 하고 오늘은 몇개나 이력서를 넣었냐 물어보고 달달한거 먹자 하며 당근과 채찍을 적당히 해주었다. 이 사람이 나를 돈 벌어오게 만드려나 싶었는데 남편은 내가 일을 해야 성취감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년이 지난 얘기지만 되돌아보면 나는 이 타지에서 내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나보다. 나 여기 와서도 잘하거든 나 안 변했어 나 여전히 잘 할 수 있거든 나 얼마나 잘할 수 있는데!! 누구한테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내가 호주 온 후 나랑 연락이 다 끈킨 한국의 지인들? 서울에 있는 우리가족? 호주에서 같이 가는 시댁분들? 모르겠다 나는 모두에게 그리고 내 자신에게 내가 영어는 딸리지만 아직 건사하다고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다시 위에 얘기를 이어가자먼 크리스마스 전날 최종 면접 봤던 리더는 가끔 링드인으로 내 안부를 물었고 How are you? 간단한 안부에 나는 엄청 길게 답장을 써서 나는 에이전시와 한 단기 디자인일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그녀는 나에게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오퍼를 주었고 6개월 되는 날 풀타임으로 일하게 되었다. 호주에서 1년이 넘게 복지가 가장 좋다는 회사도 다녀보고 한국에서보다 몇배나 되는 월급도 받아보고 시니어 디자이너로 굵직한 프로젝트도 해보았다. 이런 내 자신을 계속 증명하고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아마도 내 자신에게 나를 증명하고 싶었나보다. 그게 내가 생각했던 나의 행복이었고 내 자존심이었나보다. 그렇게 한 2년을 내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되돌아보게 되었다.


호주와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우선 누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해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나에게 뼈있는 농담을 해도 나는 영어라 알아 들을 수가 없다. 그냥 웃는다. 좋은 말이겠거니. 그리고 내 마음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수 없으니 마음속으로 삭히는 일이 많았고 무슨 말을 할때 문법이나 단어를 수없이 생각한 후 말해야 하니 뭔가 말하는데 신중해졌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한국 책을 친구삼아 많이 읽었고 때마침 한국에 자존감에 대한 책이 트랜드인지 다양한 자존감 책들을 많이 읽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주변이 보였고 남편과 시간도 많이 보내고 점점 더 가족 중심이 되었다.


지금은 더 이상 회사나 일에서 내 자존감을 찾지는 않는다. 우리 강아지랑 8시쯤 노을지는 해변을 걸을때 나는 요즘 재일 행복하다. 정말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맞지만 사실 평생 이러고 산 내 생각을 바꾸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아니 안 바뀔 것이다. 나는 좋아졌다고 내가 포장하고 있는지도 괜찮아졌다고 덮어두려고 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세상 해탈한 사람처럼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담주부터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고 이 글조차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쓰는지 모르겠다. 내 경험을 어딘가에 남기고 싶어 지금 2시간째 쓰고 앉아 있는데 계속 말이 다른 길로 세서 내가 왜 이 글을 쓰려고 했지 하며 몇번이고 지우고 쓰고 반복한다. 글을 쓰다보면 내가 원하고 하고자 하는게 명확해지는 건 확실 한 것 같다. 구직을 위한 실패의 연속이었는데 겨우 잡은 기회가 사실 그걸 내가 정말 원했더게 아닐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진심으로 원한것이 무엇인지 더 명확해졌다. 모든게 과정이고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든 과정이라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래야 오늘 글을 끝낼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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