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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B Feb 24. 2022

친구의 조건

인정 많은 보스턴 사람들

나와 아이들, 반려견 순이는 기러기 남편과 떨어져 미국에서 7년간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미국 생활은 몇 배나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걸  불편해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걸렸고,  또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미리 걱정을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았던 조용하고 작은 동네는 미국 동부의 대서양 바다가 보이는  경치가 좋은 해변이 가까이 있었고, 백인들이 많이 살았다. 여름에는 사람들이 피자 먹으며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더울 때는 수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태양과 바다를 즐기는 모습이 한가로움과 여유로움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듯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다가 동네에 세탁소가 보여 옷을 맡기러 갔다. 밖에서 언뜻 보니 동양인 여자분인 거 같아 백인보단 동양인이 편하게 여겨져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 얘길 해 보니 고등학생 때 부모님과 함께 이민 와 미국 남자랑 결혼해서 살고 있으며  한국말을 완벽하게 하는 한국 분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좁다고 느낀 게 그녀의  아버지가 내가 한방 진료부 수련의 생활을 했던 국립 의료원 치과 과장님으로 계셨다는 말에 우리는 억지로 공통점을  하나 만들면서 가깝게 느꼈다. 그녀도 백인들만 살고 있는  동네에  한국에서 갓 온 나를 보곤 반가워했다. 우린 곧 친구가 되었다. 이 친구의 인맥이 곧 나의 인맥으로 발전해 갔다.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밖에 모르는 세탁소 친구의 오랜 지인들은 나를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편하게 대해 주었다.


미국에 이민 온 지 30년 가까이 된 분들이라 30년간의 한국 문화에 대한 공백이 있었다. 단어 사용에서도 그런 걸 느낄 수 있었는데, 간혹 한국에선 이제 사용하지 않는 '부동산 중개업소를 말하는 '복덕방'이라던가 화장실 대신에 '변소'라는 단어를 말할 때 세월의 격차를 생생하게 느꼈었다. 집으로 초대받아 아주 근사한 음식을 대접받기보단  평소에 먹는 간단한 닭 요리와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음식보다는 대화가 '주 요리'(main dish)가 되는 유쾌한 저녁을 보내곤 했었다.


미국에서 만났던 분들이 항상 내게 했던 말이 있다. "어려운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다.  동남아에서 이민 온 한국말도 서툰 이웃이 있다고 가정할 때, 나는 선뜻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전화번호를 주면서 언제든 힘들 때 연락하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이분들은 내가 어떤 사람일지 예측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마음을 먼저 열어 주었다.


나보다 40살이나 많았던 70대 후반의 할머니는 어린 내 아이들을 완벽한 인격체로 대해주며 어떤 말이라도 존중해 주며, 나를 거치지 않고  아이들이 직접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학교에서 일이 생기면 꼭 전화하라고 번호를 건넨다. 이분들은 언제든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출동할 수 있는 시동을  마음속에 켜놓고  있는 멋있는 분들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추수 감사절에 나와 아이들을 초대하여 칠면조 고기와 크랜베리 파이를 맛있게 먹으며 미국 보통의 가정을 경험할 수 있는 따뜻한 추억들까지 선물로 주었다.


 체중이 40kg도 안 되는 작은 체구였지만 여장부처럼 소신 있고 솔직하게 본인을 표현했던 선자(한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계셨다)는  레스토랑에서  한 모금 마시니  머리가 핑 도는 '코즈모폴리턴'이라는 칵테일을  못 마시고 있으니 "안 마실 거면  내가 마실게" 하면서 내 걸 다 마시고도 끄떡 없었던 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911 구급차에 실려 큰 병원에 입원했다.  신장 이식 수술만이 제 기능을 못하는 선자의 신장을 대신할 수 있다는 병원 측의 진단에  따라 퇴원하여 신장이식 수술 차례를 기다리는 걸 보고 나는 한국으로 왔다.


내가 알고 지냈던 분들은 나보다 나이가 3살부터 40살이 많은 다양한 연령대의 분들이었다. 이 분들은 친구가 되는 조건에 나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분들에게 중요했던 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예의, 배려였다. 이 사람을 알면 나에게 도움이 될 거야라는 조건문은  없었다.


헤어질 때 내가 알던 모든 분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셨다. '보스턴에  오게 되면 언제든 우리 집으로  와서 지내라'라고. 곧 다시 오겠다고 하고 보스턴을 떠났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다들 잘 계시는지 궁금하다.


한국에 와서 미국에서의 경험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도움을 주려고 할 때 진정한 관계가 형성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나 같으면 저런 호의를 베풀기 쉽지 않은데"라고 생각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려고 했었고,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익숙하지 않았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방어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항상 열려있는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부분들은 내가 한의원을 하면서 환자와 소통하는데 분명히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있었다. 한의원 환자 중에도 한국 남자와 결혼한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여자분들이 눈에 띄게 많이 늘었다. 나의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보아 그 사람들도 우리들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미국에서 받았던 무조건적 신뢰와 우정을 한국에서 되갚아가며 살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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