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은 꼭 해야 할까?
2019년 여름, 엄마는 갑자기 허벅지가 가렵기 시작하더니 어깨, 팔, 등, 복부로 가려운 곳이 옮겨 다니면서 긁기 시작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먹는 약과 바르는 약 처방으로 2년째 피부병과 함께 살아오고 계신다. 엄마의 피부병은 고질병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낫겠지 하면서 동네 개인 피부과에 다녔는데 약을 먹으면 반짝 좋아지다 다시 재발하길 여러 차례, 결국 원인을 찾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옮겨 받은 진단명은 '만성 피부염'이다.
먹는 약은 스테로이드 계통이라 피부과에서도 장기적인 고용량 복용을 권하지 않는다. 가려워 긁으면 빨갛게 부풀어 오르면서 피부가 짙게 착색되어 단단해진다. 주변에서 피부병에 좋다고 권하는 온갖 것들을 엄마는 다 해보고 계시고 한약도 드신다. 차츰 엄마의 피부병은 차도가 보이면서 온 가족이 기뻐했는데, 고약한 피부병은 목덜미와 뒷머리의 경계, 두피로 자리를 옮겼다.
엄마는 평생 흰머리 염색을 하면서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분이었다. 가는 곳마다 엄마를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본다. 그때마다 엄마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런데 두피 쪽으로 자리를 옮긴 피부병 때문에 흰머리 염색을 요즘은 안 하신다. 엄마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 같아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게 힘드셨지만 염색약의 독성에 대해 재차 강조하는 자식들의 만류로 흰머리 염색을 중단하셨다.
화학 염색약이 두피에 미치는 해로움을 알고는 있지만 흰머리는 나이 듦을 솔직히 다 보여주는 것 같아 감추고 싶은 게 사실이다. 어려 보인다는 말은 젊음을 되찾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염색하지 않은 백발인 사람에게 동안이라는 말은 입 밖으로 질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흰머리 염색은 매달 치르는 중요한 행사가 된다.
한의원에 오시는 70,80대 할머니들은 길어 나오는 흰머리를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염색을 하신다. 외모를 가꾸는 모습은 보기도 좋지만, 본인의 만족감과 자신감을 올려 주기도 한다. 염색을 새롭게 하고 오신 분들은 훨씬 젊어 보인다. 그분들에게 젊어 보인다고 말하면 수줍어하면서 웃으며 좋아하는 주름 잡힌 얼굴의 표정이 귀엽기까지 하다. 그때마다 엄마가 염색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하곤 했다.
30년 가까이 매달 의식처럼 행했던 엄마의 염색은 막을 내렸다. 길어 나오는 흰머리가 처음엔 익숙하지 않고 나이가 훨씬 들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았고 오히려 홀가분하고 편해 보였다. 감추며 살아온 뭔가를 인정하고 마음속에 자유를 얻었다는 느낌도 받았다.
인정해야 하지만 감추고 싶었던 것들을 드러내고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처음에는 힘들지만 결국 홀가분하고 편하다는 걸 엄마의 흰머리 염색 중단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염색을 하는 부지런하고 외모 가꾸는 걸 좋아하는 사람과, 흰머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염색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사람을 다 좋아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를 받아들이고 자아도 나이만큼 성숙해지는 거라고 본다. 염색으로 감춰진 자아가 아니라 흰머리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솔직함과 진정성을 보여주는 자아의 모습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