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대구 사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대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환자가 반가운 대구 억양으로 말을 한다. "고향이 어디예요?", "사투리가 듣기 좋네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불현듯 서울 말투를 따라 하려고 고군분투했던 시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대구 한의대를 졸업하고 서울 국립 의료원 한방진료부에 인턴으로 왔을 때가 27살, 그 당시에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어리고도 한참 어리다.
대구에서 26년 동안 살다 올라온 서울이란 큰 도시도 낯설었지만 서울 말씨가 나에겐 더 낯설었다. 가까이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서울 말씨는 부드럽고 상냥하고 품격이 있어 보였다.
"이거 얼마 라예?" "여기 내려 주실래예?" "여기 앉아도 되예?"처럼 대구 사투리는 "예"로 끝나는 말이 많다. 다른 경상도 지역보다는 부드럽다고 하지만 투박한 면이 있었고 독특하지만 귀엽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서울에 와 보니 서울 토박이들만 사는 게 아니었다.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전국 각 지역에서 일과 학교를 찾아 올라온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모습을 보며 나도 드디어 서울에 입성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병원, 시장, 가는 곳마다 여러 지방 사투리들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중 서울 말씨는 단연코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같은 나라인데 말이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생각하며 서울에서 일을 하려면 서울말부터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련의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환자 보호자들, 스태프 선생님들, 간호사들, 진료 협조 의뢰차 갔던 양방 진료부레지던트 선생님들께 조심스럽게 서울말을 할 때면 고향이 어디냐고 꼭 묻는다. 말씨가 참 예쁘네요라는 말은 사투리를 쓴다는 말로 알아들었고 그때마다 외국어 배우는 것보다 서울말 배우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하곤 했었다.
수련의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온 지 4년이 되었을때도 여전히 연기하는 것처럼 대구 억양을 줄이고 서울말을 할려고 노력했다. 말하는 나와 듣는 상대방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모른 채 나의 서울말 흉내는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외모나 말투, 억양은 사람의 내면을 알아 가기전에 첫인상으로 자리잡기 쉽다. 선입견이 되어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에 사회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해 갈때 말투는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서울 말씨를 흉내 내서 말할 때마다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자연스럽지 못하고 나의 진심이 아닌 말들이 나오기도 했다. 나의 생각을 조리 있게 길게 말하는 걸 포기하게 되고, 짧은 대답만 하게 되면서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을 바꿔준 기회가 있었다. 가족 여행으로 제주 신라호텔에서 식사를 할 때 젊고 밝은 인상의 여자 직원이 예쁜 대구 말씨로 서방을 하고 있었다. 자기만의 부드럽고 상냥한 억양으로 변형해서 말하는 대구 억양이 처음으로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나는 대구 말씨와 억양을 숨기지 않았다. 사람들과 만났을 때 서울말을 어설프게 하는 것보다 대구 억양에 힘을 약간 빼 부드러움을 주고 나만의 향기를 뿌려 전하는 게 자연스럽고 , 상대방을 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아나운서의 말을 따라 하면서 혼자 서울말 연습도 했었지만 거짓 없고 꾸밈없는 모습이 차라리 진정성 있어 보였고, 그런 모습을 나의 매력으로 만들고 싶었다. 굳이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내며 살기보다는 내가 가진 것을 가꾸고 변형시켜 나만의 것으로 발전시키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의원에 오시는 환자분들 중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억양을 간직한 채 서울에서 사시는 분들의 다양한 사투리는 다소 딱딱한 치료실 분위기에 웃음을 주기도 한다.
원장님 고향이 어디세요?라는 물음이 몰래 과자 먹다 들킨 기분이 더 이상 아니라 떳떳하게 대구가 고향이라고 상냥하게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