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무덤이 되고 있는 남편의 방
한의원 건너편에 있는 인도 위 한평 남짓한 구두 수선집에 출근 전에 구두수선을 위해 들렀다. 한의원에 한번 진료받으러 오셨던 수선집 사장님에게 요즘 몸은 어떠시냐고 묻자, 가운을 입지 않은 모습이 많이 달라 보여 못 알아봤다고 하셨다. 요즘은 구두 수선점도 점점 고급화되어 백화점 안에 입점되어 있는 곳은 가격도 비싸고 수선 기간도 많이 걸린다. 반면 동네 한 모퉁이에 있는 이런 구두 수선집은 정겹기도 하고 수선이 되길 기다리는 동안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생각보다 수선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장님이 갑자기 "남편분은 어떤 분이세요?, 같은 한의사 분이신가요?"라고 물으셨다. 의사들은 의사들끼리 결혼하던데 하시며 사장님은 나의 결혼생활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한의사가 아니고 사업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대답하고 수선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한의원으로 출근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미국에 있는 회사와 통화하기 위해 밤늦은 시각, 새벽까지 일어나 있는 날이 많다. 주로 거실에서 통화하는 소리는 잠을 자고 있던 나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어 목소리톤으로 사업의 진행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몸에 열이 많아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 놓고 자야하고, 코까지 골아 여행 가서 아들은 남편과 같은 방에 자는 걸 꺼려하거나 귀마개를 하고 잔다.
초저녁 잠이 많아 일찍 잠이 들고, 추위를 많이 타 실내 온도를 높이고, 창문을 꽁꽁 닫고도 이불을 코까지 끌어 덮고 자는 나는 남편과 체질이 많이 다르다. 결혼초에 남편은 사우나처럼 숨 막혀 죽을 것 같아도 같은 침대에서 자는 성의를 보였지만 답답한 건 못 참는 체질이라 슬금슬금 거실로 나갔고 남편은 거실에서, 나는 안방에서 남편 대신 어린 아들과 같이 자게 되었다. 지금은 나 혼자 침대를 독차지해서 자는 게 익숙해져 있고, 오히려 편하다.
집안에서 나에게 책 읽고 글 쓸 공간이 필요하듯이 남편도 일할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이들 책꽂이가 있던 우리 집에서 가장 시원한 북향 공부방에 책상을 들여놓고 밝은 LED 등으로 바꾸면서 남편의 공부방을 만들었다. 그런데 폐소공포증이 있는 남편은 그 방에만 머무르지 않고 거실까지 본인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나는 부엌과 안방을 , 남편은 공부방과 거실을 우리둘은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점점 남편의 공부방은 잡동사니들을 가져다 놓는 창고처럼 변하고 있었다. 여름철이 지나면 필요 없는 선풍기들, 지금 당장 쓰지 않는 여행 가방들을 보관할 만한 공간은 그 방이 제일 만만했다. 마치 가방 무덤처럼 오래되어 쓰지 않는 가방들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나는 내 방도 아닌데뭐 하면서 신경 쓰지 않았다.
무늬만 남편의 작업실이지 내가 봐도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방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떤 주부는 남편방을 만들어주면 그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까 봐 겁나서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내 남편이 그 방에 들어가 있는 시간은 하루 중 10분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한편 내가 차지하고 있는 방은 책 읽기와 글쓰기에 최적의 상태로 만들었다. 불필요한 물건들은 다 남편의 작업실로 갖다 놓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죄책감을 약간 느꼈다.
같은 집에 살지만 각자의 공간을 가지는 건 나쁘진 않은 것 같다. 하루를 정리할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고, 생각이 들어갈수 있는 여백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여백을 가지고 살고 있다. 만약 지금도 집에서 계속 붙어 있다면 옆에서 내가 뭘 하고 있나 엿보게 되고 감히 이런 글을 쓸 용기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요즘은 부부가 꼭 같은 침대에서 자야 하고 집에서 뭔가를 항상 같이 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발전할 수 있고 계발할 수 있는 시간을 서로에게 주고, 가끔 연애할 때의 달콤했던 기억들을 아스라이 찾고 싶어 하는 애틋함을 가져보고, 같이 있음에 안도를 느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합리화시키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남편의 껌딱지였던 내가 여태껏 껌딱지로 살고 있다면 현재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결혼 전 남편은 자기만 바라보고 사는 여자보다 자기 일이 있어 열심히 사는 여자가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스로 블루칼라로 여기던 동네 구두 수선집 사장님은 화이트 칼라로 보이는 내가 어떤 사람이랑 결혼해서 어떤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 하셨다. 나라고 특별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 부부는 맞는 것보다 맞지 않는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공통점을 가지고 서로에게 각자의 공간을 선물하고 흐르는 시간을 공유하면서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가끔 가족들이 영화를 볼때는 거실이 남편것이 아닌 우리들의 거실이 되고 공부방에 쌓여가는 잡동사니들과 가방들에 불평없이 그 방에 머무는 시간을 줄임으로써 묵언의 시위를 하는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실과 시원한 공부방은 남편의 공간임에 틀림없고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