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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B Jan 03. 2022

신성한 장소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밤 10시엔 어김없이 잠자리에  드는 나는 자다가 두세 번은 깨는 거 같다 시계는 선명하게 밤 12시, 새벽 3시, 새벽 4시라고 알려준다.

아직 일어날 시간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출근 전에 여유를 두고 샤워도 해야 하고 머리손질, 화장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자다가 몇 번씩 일어나 시계를 보고 다시 잠이 들기를 8년째

한의원을 시작한 햇수랑 같다.


 알람을 맞춘 새벽 5시에 눈이 뜨이면  20분 정도 이불속에서 자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일어난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있으면서 스마트폰 은행 앱으로 들어가 잔고가 얼마 있나 확인한다.

은행이 쉬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하루 일과 중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눈이 뜨이질 않아 간신히 반쯤 뜬 눈을 부릅뜨려고 애쓰며 페이스 아이디로 로그인을 시도한다.

액정 화면에는 눈을 더 크게 뜨라는 메시지와 함께 아이디 확인에 실패했다고 뜬다.

그럴 때는 간편 비밀번호를 눌러 로그인을 한다. 이렇게까지 은행 앱을 굳이 여는 이유는 카드로 결제한 환자들의 진료비가 2-3일 내로 은행계좌에 입금이 되는데, 마치  내 수중에 돈이 다 떨어진 꿈을 꾼 것처럼 화들짝 놀라 매일 새벽 일어나자마자 잔고를 확인하는 게 버릇이 돼버렸다.


 한의원 소모품을 주문할 수 있는 돈이 있나, 한약재값을 지불할 돈이 있나 직원들 월급 줄 돈이 있는지, 임대료를 낼 돈이 되는지 미리 계산해 보는 매일 새벽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들은 한의원을 하면 다 부자가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나도 개원하면 당연히 부자가 되는 줄  알고 8년 전 개원할 자금을 은행에서 대출받을 때 일 년 내로 갚을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은행 대출 담당 직원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걸 개원 후 바로 알게 되었다. 깨달았다. 모든 일에 '당연히'는 없다는 것을. 앞으로 갈 길이 쉽지만은 않겠다는 것을.

개원할 당시 한의원 바로 옆에 있던 동네는 아주 오래된 다가구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개발이 안된 동네였다. 서울시안에서는 새 아파트 단지를 지을 공터가 없기에 이런 오래되고 낙후된 동네들을 재개발해서 아파트를 지었다. 살고 있던 서민들은 재개발이 되는 동네에서 쫓겨나 외곽으로 이사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오던 환자들은 하나둘씩 이사를 나가고 마침내 동네는 텅 비게 되었다. 한의원도 텅 비고 내 마음은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런 시나리오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실망감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뜻대로 모든 일이 된다면 노력할 필요도 없고, 행운을 빌어달라고 기도할 일도 없고, 나 자신을 돌아볼 일도 없을 것이다.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더 잘될 거란 희망으로 살다 보니 개원 8년 차가 되어있다. 지난 8년이란 시간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든 시기이면서 값어치 있는 시간이라 말할 수 있다. 나와의 대화를 가장 많이 한 시간이면서 나를 가장 많이 고통스럽게 한 시간이었다. 그 고통은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과 같았으며 나와의 대화는 그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부드러운 엄마의 손길 같았다. 그런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한 후엔 키가 훌쩍 커 버린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고통에 면역이 길러지고, 잔고를 확인하면서 내쉬는 한숨이 줄어들고, 밝아오는 새벽이 기쁨으로 느껴지고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고 발음도 뚜렷해지면서 환자와의 대화가 즐거울 때 진료실에는 보이지 않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그 기운은 매일 오진 않는다. 하지만 일할 곳이 있고, 날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 있고, 책을 읽을 시간도 허락해 주고  미약한 출발이지만  마음 정리할 수 있는 글쓰기라는 큰 꿈을 갖게 해 준 한의원이 이젠 불평 덩이리가 아니라 신성한 장소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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