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되어서야 한의원을 나설 수 있었다.
한의원을 하면서 나한테 없던 증상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중 첫 번째가 두통이다.
두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얼마나 괴로운지 짐작할 수 없다. 발을 삐거나 손가락을 다쳤을 때 통증과 생활의 불편함은 있지만 그래도 견딜 만은 하다. 하지만 두통은 생활 자체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침놓고 환자와 상담을 해야 하는 나로선 두통이 오기 시작하면 앞으로 닥쳐올 재앙이 두렵기만 하다.
마치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미리 대비하지만 태풍의 영향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때가 많듯이 두통도 그렇다.
보통 정상적인 경추는 C자 모양으로 커브가 있다. 경추가 커브 없이 일자로 되어있는 나는 고개를 한참 숙이고 침을 놓고 나면 뒷목이 뻐근해지기 시작한다. 이때 쉬어줘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들이 더 많다.
오후쯤 되면 점점 내 목소리에 힘이 없어지고, 침을 놓을 때 목을 숙이지 않으려고 자동으로 몸이 방어한다.
뒷목의 근육이 위쪽 머리와 양 어깨 쪽 승모근에 연결되어 있어 근육이 긴장을 하게 되면 팽팽한 밧줄처럼 단단해지고, 양쪽 아래위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근육들이 서로 세게 잡아당기는 것 같다. 두개골을 감싸고 있는 근육들은 나의 머리를 꽉 움켜 잡았다 놨다 하는 느낌이다.
이때부턴 나도 손을 쓸 방법이 없이 두통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내방 의자에 앉아 머리를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진정시켜 보려고 하는데, 그것도 잠시 치료실로 또 나가야 한다.
두통은 처음엔 1,2,3으로 진행이 되다가 갑자기 5, 8로 강도가 심해진다.
오늘 집에 못 가겠구나 하는 예감이 드는 날은 아주 심한 날인데, 밤 9시 , 10시까지 불 꺼진 한의원 베드에 누워 두통이 가라앉길 기다린다.
집에 운전해서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도 두통이 다 나은 건 아니다. 집에 겨우겨우 도착해 강아지 순이한테 날 기다려준 고마움의 보답으로 간식을 주고는 그대로 쓰러지듯 침대에 눕는다. 내일 아침엔 출근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이렇게 한바탕 두통과의 싸움이 끝난 다음 날은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든다. 침으로 환자의 병을 무찌를 수 있겠다는 전의에 불타고 아침의 공기와 하늘 위의 구름, 떠 다니는 먼지까지 아름답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는 그렇지 못했다. 한의원에서 끙끙대며 집에 못 갈 정도의 두통이 반복되자 7년 전 하늘나라로 떠난 친했던 후배 한의사가 떠 올랐다. 그 후배는 나보다 더 심한 두통 때문에 한의원 진료시간 중에 문을 닫고 응급실로 가길 여러 차례, 나중에 간암으로 밝혀졌었다. 긴장형 두통 그까짓 거 때문에 이 세상에 없는 후배를 생각하다니 마음이 너무 약해졌었나 보다. 침을 놓다가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아무도 나의 눈물을 안보길 바라면서 티슈를 끄내 닦았다.
나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건 나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이었다. '그건 직업병이야 어쩔 수 없어,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하기보다 '너무 수고가 많아, 힘들지? , 힘들면 쉬어'라고 말해주길 바랬던 거 같다. 그렇게 눈물을 흘린후 나는 두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의사로 사는 동안, 환자들에게 침을 놓는 이 직업에 보람을 느끼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달고 살아야 하는 직업병이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