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글쓰기
내가 일하는 방에는 창문이 없다. 물론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환자 대기실을 비춰주던 cctv 화면이 창문 역할을 했었으나 내 실력으론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눈을 감고 있은지 이 년째다. 처음엔 고쳐보려고 애를 썼지만 진료하는 일 외에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게 싫어서 그냥 방치해두고 있다.
천장에 달려있는 LED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을 밝혀주는 유일한 조명이다.
여름엔 그나마 해가 길어 출퇴근할 때 태양의 기운을 받을 수 있지만 밤이 긴 겨울엔 출근 때 만 잠시 태양과 인사를 나눈다. 햇빛을 쬐면 절로 얻어지는 비타민 D를 햇빛이 아닌 알약으로 매일 두 알씩 복용하면서 나의 뼈 건강을 기도한다. 하루 15-20분 정도 햇빛을 쬐서 얻을 수 있는 비타민 D는 골질환 , 골절과 관계가 있다
아침 9시가 넘어 이 좁은 방에서 나의 일과는 시작한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인공조명을 태양 삼아 9시간 넘게 보내는 이 공간이 의외로 나쁘지 않다. 일요일이나 공휴일 같은 쉬는 날엔 집에서 왔다 갔다 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먹을게 뭐가 있나 들여다보다 요리를 하고 , 내일 해도 될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두어 번 돌리고, 강아지가 마실 물에 먼지가 떠다니면 몇 번이고 새 물로 갈아준 후 공부 모드로 바꾸는 순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셔 집중이 안 된다. 정신적 피곤함을 노동으로 풀 작정으로 휴일은 이렇게 지나가 버린다. 쉬는 날 집에선 책이 읽히지 않고 공부가 되지 않아 집중이 필요한 책 읽기나 글쓰기는 주로 진료실에서 하는 편이다.
환자가 없는 한가한 날에는 진료실을 공부방 삼아 책을 끄내 읽는다. 그런 날 읽은 책들 중, 반복해서 몇 번 읽으며 성스럽게 여기는 책이 있다. "혼자 사는 즐거움"이란 제목으로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이 되었으나 원서의 제목은 "simple abundance”로 작가가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매일 하루씩 읽을 수 있도록 365개의 소제목을 붙여 썼다. 한글 번역 책은 그중 몇 개를 발췌해서 출판을 했다는걸 원서를 사기위해 검색하면서 알게 되었다.
작가의 통찰력에 감동받아 책을 옮겨 적는 필사를 해보니 어휘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면서 머릿속에 인쇄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고 옮기고 글을 쓰는 일을 창문 없는 독방에서 다 할 수 있었던 건 눈 부신 햇빛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처럼 코로나로 인해 조용한 날이 많은 날에는 독방에서 외로움, 자아비판과 싸우기보단 나의 성장을 돕는 일들을 할 수 있어 다행으로 여긴다.
하루 24시간 중 9시간을 보내는 해가 들어오지 않는 독방은 환자들의 초진 방문 때 설레는 첫 만남을 이루어지게 해주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가끔 환자들의 횡포도 겪어야 했던 숨겨진 이야기를 많이 간직한 공간이다.
환기를 시킬 수 있는 창문이 없어 틀어놓은 공기 청정기 소리는 희한하게도 소리만으로 위안이 된다. 폐쇄된 공간에 떠다니는 오염물질을 흡수하고 공기의 흐름을 순환시켜주는 일을 잘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강아지에게 종을 울린 후 밥을 줬더니 나중엔 종만 울려도 밥 주는 줄 알고 침를 흘렸다는 실험처럼 나의 인지 능력도 길들여지고 있었다.
공기 청정기가 작동되는 의문의 공기 속에서 LED 빛을 벗 삼아 좀처럼 호전이 잘 되지 않는 환자 치료에 대해 고민하고, 비타민 D 보충제 먹으며 스쿼트 동작도 따라 해 보고, 실눈으로 벽에 걸린 뉴욕 타임스 스퀘어 거리를 그린 그림을 바라볼 때 이보다 더 나은 독방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