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코리안 마인드
브리즈번 공항의 첫 기억은 굉장히 차분하고 밝았다.
이제 막 겨울로 접어들던 터라 그다지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막 도착한 사람들이 제 갈길을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항 주위를 둘러싼 초록 내음 가득한 나무들과 그 자연이 주는 평온함에 모든 게 차분하게 보였고 직원들과 버스 기사님들의 표정들도 느긋해 보였다. 이제 나는 버스를 타고 백패커를 찾아가야 했다. 백패커의 이름과 그 동네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었지만 혹시 몰라 버스를 타기 전 기사님께 다시 물어보았다. 그쪽으로 간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님이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내리고 보니 여긴 어디지..?
난감했다. 여기가 어디람? 을 남발하며 '이거 인종차별 같다. 내가 아시안 여자라고 괜히 아무 데나 내려준 거 아냐?' 싶었다.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물어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숙소 근처의 큰 대로변 버스 정류장에 내려주신 거였고, 숙소는 거기서 골목으로 조금 더 올라가야 했었다. 감출 수 없을 정도의 민망함이 몰려왔고 스스로 부끄러웠다. 딱 보아도 처음 해외 나와서 긴장한 티가 역력한 아시안 여자를 나름 친절히 도와 주신거였을텐데 오히려 내가 역 인종차별을 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백패커 앞에 도착한 나.
‘ 쭈뼛쭈뼛 여기가 맞나.. 맞겠지..? 들어가야 하는데... ‘
온몸의 에너지가 날아가버릴 정도의 긴장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마침내 옆으로 외국 여자 2명이 지나갔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졸래 따라 들어갔다.
‘ Hi!.... Hello...? ‘
나의 염소 소리 같은 인사에 10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나왔다.
‘ 안녕! 어떻게 도와줄까? ‘
‘ 응, 안녕. 나 예약했는데.. 000 이름으로. ‘
‘ 잠시만.. 오케이! 확인했어. 4인실 도미토리로 예약했네. 00호실인데 거기에 아마 지금 다른 애들도 있을 거야. 안내해줄게. 따라와. ‘
속사포로 이야기하는 것에 당황하기도 전에 방을 안내하러 가는 그녀는 벌써 저만치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 아니.. 짐이 많으면 원래 도와준다고 물어라도 봐야 하는 거 아냐? 이렇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왔는데 못 본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
2층까지 가는 계단을 ( 오래된 백팩이어서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 혼자 끙끙 대며 큰 캐리어 가방을 들고 따라갔다. 속으로는 이미 꽁해있었다. 억울하기도 했고. 또 다른 (확실한) 인종차별이라 생각했다.
첫날인데 짜증 내지 말자, 하며 자기 위로를 하고 2일 동안 머무를 백팩을 잠시 살펴보기로 했다.
그 백팩은 저렴한 숙박 가격으로 타 나라의 여행객들도 굉장히 많았는데 여기 저기 시설을 둘러보다 한 가지 번뜩 깨달았다. 모두가 각자의 일을 알아서 한다는 것을. 세탁이든, 요리든, 짐을 드는 일이든.
Independent!
외국 문화를 그렇게 줄줄이 달고 살며 꿰고 있었건만 어째서 이런 걸 캐치하지 못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프런트 데스크의 그녀는 전형적인 백인 여자 (또는 히스패닉 계열)이었는데, 그녀에게는 업무상 숙박객들의 짐을 들어다 줄 의무는 없었다. 또한 짐이 너무 무거웠다면 내가 정중히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면 될 일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좋든 싫든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그것을 당연시 여겼다. 내가 조금 힘들어하는 게 있다면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고 알아서 나서서 도와줄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고 무언가를 먹을 때도 옆에 사람이 있으면 한쪽 정도 권한다던가 같이 챙겨서 먹는 집단 아니었던가. 하지만 호주에 오자마자 이 모든 관념이 와장창 박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도착한 이후로의 일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한국인 마인드로 나는 무작정 서양권 나라에 입성했다. 내 마음의 안경은 이미 삐뚤어진 채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판단했다. 무언가 큰일이 난 듯 가슴이 요동치며 진정이 되질 않았다.
‘ 만만치 않겠는데.. 나.. 잘할 수 있을까?.. ‘
내가 묵을 방에는 다른 백인 여자 2명이 더 있었다. 온 지 며칠 되었는지 각자의 자리에 짐이 너부러져 있었고, 책을 보던 그녀들은 내가 들어서니 살짝 눈웃음을 해 주었다. 나는 조금 쑥스러웠기에 작은 미소로 답했다. 내 자리에 짐을 풀고 어색한 몸짓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침대에 누워보았다.
‘ 아.. 좁고 불편하다. ‘
조용하고 삭막한 공기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말을 붙이기도 애매하고 가만히 있자니 이상했다.
주섬주섬 다시 나와 번화가로 나가 장을 보기로 했다.
지도를 보며 둘러보니 조금만 걸어가면 큰 버스 터미널이 있었고 그 근처로 편의점과 펍들이 있었다.
또 조금만 더 가면 바로 CBD(Central business district 중심 업무지구, 주로 '시티'라고 부름)였다.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 아, 여기가 호주구나. 내가 호주에 있구나.. ‘
내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도시'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몇몇의 회사 건물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낮은 층으로 지어졌다. 그들은 단조로웠고, 각자의 빌딩들이 서로 색감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건물 주위로 대부분 자연을 배치해 두었는데, 가로수, 넓은 잔디밭, 나무 밑 벤치, 알록달록한 꽃들이 핀 미니 가든까지.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고 몇몇은 잔디밭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샌드위치를 먹고, 또 몇몇은 버스를 기다리며 책을 보거나 멍하니 주위를 즐기고 있었다.
장을 보러 가는 몇 분 만에 이 도시, 이 나라는 내 마음을 붙잡고 흔들어 버렸다.
한국에서의 높은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들, 줄지어 늘어선 자동차들, 피곤에 찌들어 졸거나 인상을 찌푸린 사람들의 장면에서 이 여유롭고 한적한, 색감마저 아름다운 도시를 보고 있자니 누군들 안 빠지고 배기겠는가. 너무도 달라서 느꼈던 놀라움마저 이 나라는 아름다운 자연과 불꽃 색깔의 금빛 석양으로 나를 녹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