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하나
20살 겨울, 나는 네팔에 있었다. 인도에서 ‘Peace March’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에 네팔에 먼저 들린 것이었다. Peace March는 네팔에서 인도까지 걷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인도 친구들과 함께 평화를 주제로 이야기하며 걸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전기가 자주 끊겼다. 호텔에서도 히터가 없어 추울까 봐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자거나 식당에서는 모모 만두를 먹다가 전기가 나가 촛불을 켜고 식사를 했다.
카트만두의 전경을 볼 수 있다던 작은 뒷산을 올라갔다. 우연히 30살의 한국인 언니를 만나게 된다. 사실 언니의 정확한 나이는 생각나지 않는다. 20살의 나에겐 매우 어른 같은 느낌이라서 30살로 기억할 뿐이다. 등산복으로 무장한 그녀는 키가 크고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연차를 모아서 그녀는 2주 동안 히말라야 산을 타려고 네팔에 왔다고 했다. 한국 회사는 긴 연차가 어렵지 않냐는 놀라움이 섞인 나의 질문에 그녀는 담담하게 가능하다고 자주 그렇게 한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여자가 혼자서 보수적이라는 한국 기업에서 긴 연차를 내고 용감하게 네팔의 산을 타러 왔다. 20살의 나에겐 그녀는 독립적이고 단단한 자아의 표상이었다. 잠깐 스친 인연이기에 잊고 있었는데 문득 그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만에 와 훌쩍 커버린 나는 그녀와 닮아가고 있었다.
플래시백 둘
스페인 교환학생 시절 나는 엉뚱하게 대학교 수업보다는 시내의 사설 학원 수업을 더 열심히 들었다. 나는 구글 지도에서 ‘Spanish’라고 검색하여 Gran Via에 있는 학원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초보 레벨반에는 호주, 이탈리아, 영국, 슬로보 키아 등 여러 지역에서 온 생활형 친구들만 있었고, 거기에서 ‘리사’를 만나게 된다. 중국인인 리사는 런던에서 스페니쉬 남편을 만나 함께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그녀는 큰 입으로 호탕하게 웃으며, 늘 식당 밖에서 이탈리아 친구와 담배를 피곤했다. 스페인어는 'Hola' 인사만 할 줄 아는 리사는 국제적인 런던을 떠나서 그녀가 매일 불평한 것처럼 비교적 전통적인 마드리드에서 살게 되었다. 리사는 풍성하고 긴 파마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드리드로 이주하고 며칠 후에 큰 가위로 머리카락을 댕강 모조리 잘라버렸다. 당시에는 리사의 풍성한 파마머리를 포기하고 못생긴 쇼트커트를 한 리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더 빠르게 뛰기
나는 가끔 너무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 충동 뒤에 따라오는 리스크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며 때로는 어마어마한 자신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마라톤 연습을 하기 위해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사범대 운동장을 돌았다. 목표하는 거리를 뛰기 위해서는 운동장을 10바퀴 이상 뛰어야 했는데 머리가 감당할 수 없게 길어버리니 묶었던 머리가 무거워 자꾸 흘러내렸다.
머리를 자르기에는 내 몸은 아직 충분히 날씬하지 못했다. 머리까지 짧은데 뚱뚱하기까지 하면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모든 욕망이 귀찮아지고 쉽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지는 변계점에 닿았다. 나는 아름답기보다는 빠르게 달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에게 못생겨 보이는 신경 쓸 바 아니었다. 두 발로 뛰고 싶은 만큼 뛰지도 못한다면 내 존엄성(Dignity)이 손상되는 듯했다.
나는 급하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미용 가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거친 쇠 가위를 아파트의 공동 서랍에서 찾아냈다.
샤샥- 샤샥-
나는 흥분에 가까운 감정에 휩싸였다. 투박한 가위 날로 찢어내듯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무거운 머리는 나에게 마지막 남은 눈치와 지겹게 나를 옥죄우는 여성성 같은 것이었기에 한 밤 중의 가위질은 어떠한 환희와 쾌감에 가까웠다. 제멋대로 잘라버린 머리카락은 서로 길이도 맞지 않았다. 목 뒤와 옷 위에는 자잘한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붙어있어 며칠 동안 털어내야 했다. 다음 날 엉망진창인 머리 상태를 본 지인들은 모두 경악했는데 나는 이것이 인생 처음의 반항이었음을 깨닫고 기뻐했다. 특히 한국인 지인들은 내가 정신이 잠깐 나갔는지 걱정할 태세로 나를 대했다.
주말에 나는 미용실에 가서 아주 아주 짧게 머리카락을 잘라버렸다. 거의 머리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는데, 쑥스러워 머리를 긁으려 해도 손가락에 잡히는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미용실을 나와 자전거를 탔다. 차가운 바람이 목 뒤와 두피를 때렸다. 추웠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짧은 머리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훔칫 놀라고 뒷골이 서늘해졌다. 순간적으로 후회의 감정이 감돌기도 했다.
쇼트커트로 처음 자르고 친구 브루스를 처음 만났는데 살짝 인상을 쓰며 ‘為什麼剪那麼短短?(머리를 왜 이렇게 짧게 잘랐어?)이라고 소리를 쳤다. 누군가에게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짧은 머리였다는 것인데 사실 내가 원하던 바이기도 했다. 정상이라는 범주를 벗어났고 더 이상 예쁜 한국인이 아니니 친구들이 나를 떠나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친구들은 여전히 내 옆에 있었다.
존버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많은 스타트업이 글로벌 인력을 고용하고 해당 국가의 시장조사 및 진출 전략부터 맡기는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 전사적인 차원에서 진지하게 해외시장을 고려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담당자는 언제든 잘릴 수 있는 고용 불안을 겪는다. 해외 기업에서 한국 시장 담당으로 채용을 생각할 경우에는 전사적으로 회사가 진짜로 한국 진출에 의지가 있으며 본격적인 사전 검토를 끝냈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내가 첫 번째로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는 사전 시장 검토도 없이 한국, 일본, 베트남, 홍콩 인턴을 뽑아 글로벌 팀을 운영했다. 적은 예산으로 각 시장에 간을 보고 반응이 오면 서비스 국가를 확장할 계획이었다. 한국에는 똑같이 동영상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서비스 앱이 존재했다. 경쟁사는 브랜드 캠페인을 하기 전이었지만 입소문을 타서 점점 유저를 늘려가고 있는 단계였다. 경쟁사와 비교했을 때 특출한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고, 한국어로 로컬라이징 되어 있지 않은 우리 앱이 현지 어플과 경쟁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대표는 로컬 경쟁사 앱이 없고 유저 반응이 오는 베트남 스태프만 남기고 한국 시장 진출을 접기로 결정했고 나도 회사를 떠났다.
근무하면서 꽤 즐거웠다. 애플리케이션/ 웹페이지 서비스 기반의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웹/앱 서비스 조직의 경우 유통이나 영업의 비중이 적고 엔지니어와 PM의 힘이 비교적 강한 것도 알게 되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효율적으로 일하는 스타트업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동료들 덕분에 즐거웠다. 베트남 동료들은 3개 국어를 하는 똑똑이들이었다. 홍콩, 일본 동료는 대만 정치대학교에서 석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만난 홍콩 친구는 석사 졸업 후에 대만 회사에 취업을 했고 내가 이직할 때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글로벌한 환경에서 소통하며 대만에서 네트워크를 쌓아갔다.
퉁명스러운 매니저 Sam을 만나 마케팅을 배우다.
첫 번째 회사와 작별을 고하고 다음에 근무하게 된 곳은 중국어 튜터 애플리케이션 회사였다. 주로 영어를 사용하는 유저 대상으로 중국어 튜터 서비스를 판매하는 회사였는데 매니저는 샘(Sam)이라는 미국인이었다. 반바지에 실내화를 신고 출근하던 샘은 대표와 co-founder였다.
미국 유저 대상으로 홈페이지 및 애플리케이션 마케팅을 상당수 진행하고 있어 나름 업무 프로세스가 잡혀있는 단계였다. SEO, SEM, 콘텐츠 제작, 어필리에이트 협력 등 마케팅 전반의 업무를 샘과 함께 차근차근해나갔다. CPA 모델의 어필리에이트 마케팅 협력을 한국인 개발자와 체결하기로 한 날은 샘이 첫 딜이라며 코로나 맥주를 사 와 병나발을 불면서 근무를 한적도 있다. 맥주 에피소드는 예외적인 경우로 샘은 퉁명스러운 성격이었다. 지금은 대만인 여성과 결혼하여 쌍둥이 아빠가 되었다.
마케팅 업무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있을 때, 회사 대표가 B2B 영업 업무를 추가적으로 해 볼 것을 제안했다. 하나는 B2C로 서비스하고 있는 튜터 프로그램을 에듀 기업들에게 판매하는 업무였고 두 번째는 한국 기업에게 중화권 진출 설루션( 오퍼레이션 및 고객 서비스 센터)을 판매하는 업무였다. 한국어 튜터 App과 한국 맛집 플랫폼 회사와 호텔 예약 플랫폼 와의 딜을 성사시켰다. 인턴으로 들어와 나는 정규직 직원만큼 일하고 있었다. 내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핀밍(拼命 : 목숨을 걸고 열심히 하다)으로 일을 했다. 샘이 웹페이지와 애플리케이션 번역을 요청할 때면 나는 회사 근처에서 혀가 아릴 정도로 단 흑당 버블티를 사 왔다. 버블티를 약처럼 마시면서 하루 만에 방대한 번역을 끝내곤 했다. 대표는 낮은 기본급을 주지만 영업을 성공시킬 때마다 커미션을 주겠다며 나를 회유했다.
나는 생활비가 정말 부족해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에는 한국어 과외까지 여러 개 하고 있었다. 아무리 일해도 자금이 달리자 겁이 없어진 나는 대표한테 딜에 대한 커미션뿐만 아니라 명절마다 주는 보너스까지 요구했다. 안되면 말고 식으로 당당하게 이야기했는데 대표는 정말 보너스까지 주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정식 워킹비자를 주는 회사를 찾아야 했다. 회사에서 정식 비자를 주지 않을 것 같아 일을 그만둔다고 전했다. 대표는 워킹 비자를 도와준다고 하며 나를 잡았지만, 프랑스 국적 직원에게 편법으로 워킹 비자에 충족되지 않는 낮은 연봉을 주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깨끗하게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회사를 떠나자 한국 회사들은 한국인 없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어렵다며 계약 해지를 원했고 대표는 이후 메신저로 나에게 이딴 식으로 일하면 너는 대만 스타트업 씬에서 어려울 것이라며 나를 협박했다. 그럼에도 나는 되바라지게 회사를 떠났다. 대만에서 정식 비자 주는 회사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때의 내가 기특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다시 잡 헌팅에 나섰다.
나를 존중해지고 정식 비자도 줄 수 있는 회사를 찾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