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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Jeon Oct 24. 2021

4. 보다 더 자유로운



웃통을 벗고 일하던 노모

집 근처 보도블록에서 공사가 한창이다.  땀이 줄줄 흐르는 더운 날씨라서 한 인부가 웃통을 벗고 일하고 있다.  거의 남아있지 않은 가슴살 때문에 언뜻 보면 남자의 몸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자 인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나의 무례하고 눈치 없는 시선으로 인해 인부는 약간 움츠려 든 듯했다. 그녀는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그 나이대의 남성 노동자들처럼 땀을 흘리며  육체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대만은 ‘감히’ 여자도 웃통을 벗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다르게 생기거나 행동해도 타인의 아이덴디티로 존중하고 살아간다. 매번 감탄하는 대만의 우아함이다.


쭌중(尊重, Respect)

친구 행크가 뻔히 질문을 던진다. “대만의 어떤 점이 좋아?”  행크와 나는 한 일본식 이자카야에 있었다.  대만에 살기 전 2박 3일로 잠깐 타이베이로 여행을 왔었다. 이 이자카야는 에어비앤비 숙소를 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늦은 밤까지 빨간색 불이 켜있고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아늑한 느낌이 기억에 남았다.


1년 전쯤에 자전거로 다안 지역(大安區을 누비다가 운명처럼 그 장소를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 장소와 어울리다고 생각한 사람이 행크였다. 그곳에서 행크는 나에게 물었는데, 대만이 왜 좋냐는 것이었다. 뻔하고 클래식한 질문이지만 진지하게 답변한 적은 없던 질문이었다.  「존중」이라는 단어가 중국어로도 영어로도 생각이 나지 않아, 인상을 쓰며 곰곰이 생각한다.


“아 쭌 중!(總重)Respect! 남을 향한 존중이 제일 큰 이유야. 예를 들면 말이야, 내가 이상한 옷을 입고 다녀도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아. 그게 좋은 점이야. 그렇지만 내가 도움을 청하면 인간미 있게 나를 도와줘. 개인적이면서도 서로를 존중해. 이게 내가 대만을 좋아하는 이유야. 나랑 잘 맞아.” 행크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오르고, 그가 말한다. “그건 대만에서 너무나 상식이잖아!”  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예의와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대만의 여인들

내가 좋아하는 대만의 여인들은 두 가지 유형이다. 첫 번째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옷차림 센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린아이처럼 커다란 동물 캐릭터가 프린트되어 있는 옷을 입는다. 간혹 정체 모를 털이 비즈처럼 장식되어 있는 옷을 입는다. 색깔 선택도 이리 촌스러울 수 없다. 빨간색, 분홍색, 초록색.. 어지러운 색 조합이 현란하다.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장년 층 여성이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모습도 본 적이 있다. 패션 테러리스트들은 한국에서는 멸시의 시선을 받기 쉽다. 타인의 조롱과 이죽거림, 비웃음으로 뒤통수가 따가울 것이다. 대만에서는 미움의 감정이 시선에 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촌스럽고 정리되지 않아 서툴어 보이는 사람들도 자유롭게 거리를 걸어 다닌다.


내가 좋아하는 두 번째 여성 유형은 어쩔 때는 재수 없을 정도로 콧대가 높은 고고한 50대 이상의 중년들이다. 짧은 머리를 하고 마른 몸을 가졌는데 주로 도서관에서 책이나 신문을 혼자 읽고 있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들은 혼자이며, 자유롭고 자신의 세계가 공고하다. 고집이라는 요소는 그들에게 따라붙기 마련이다. 무뚝뚝하게 자신이 가장 원하는 일을 차분하게 처리하는 모습이 참 생경하다. 대만에서는 주주찬이라는 뷔페식당이 있다. 카페테리아나 한식 뷔페처럼 여러 종류의 음식을 골라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주주찬 덕분에 나도 식사 걱정을 덜했다.  반찬, 국, 밥을 골라서 150nt( 6000원) 내에서 한 끼를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다. 주주찬에 가면 혼자 밥을 먹으러 온 중년, 노인 남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자기 밥은 알아서 챙겨 먹는 남성들이 있어 대만의 고고한 여성들은 혼자의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여성에게 전화번호를 묻지 않는 사회

한 번은 신촌에서 길을 걷고 있다 한 남성이 번호를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거절을 했다가 뒤통수로 ‘지가 예쁜 줄 알아 쌍년’이라는 욕을 먹었다. 한 작가는 90년대의 한국 사회가 보다 낭만이 칭한다. 청년들이 여자에게 번호를 묻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그때의 사랑, 구애, 낭만이 넘쳐흘렀다고.  나는 그 작가의 말을 부정한다. 여성에게 관심이 있지만 거절을 당하면 외모 비하적인 욕설을 하는 치졸한 남성들은 ‘여성을 헌팅하는 사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우습게도 대만에서 남성들이 나를 여성이 아닌 그저 ‘사람’으로 대할 때 나는 서운함과 시시함을 느꼈다. 나를 매력적이고 성적인 대상으로 봐주지 않다니! 라며 분노했다. 대만에서 1년을 살다 보니 오히려 나를 품평의 잣대에 올리지 않은 사회에 편안함을 느낀다. 나를 남자와 다르지 않는 사람으로서 인식하는 사회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남성의 성욕과 낭만의 대상으로 강요된 감각에서 벗어날 때 처음에는 공허함을 느끼지만 곧 나는 새로운 자유를 맛본다.


금요일 밤에는 스윙댄스를 춘다. 스윙댄스란 남녀가 짝을 이루어 재즈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금요일 퇴근을 하면 주말이 시작된다. 신나게 춤을 추고 집 근처에 돌아왔을 때가 밤 11시쯤이었다. 골목을 걷고 있을 때 뒤에서 슬금슬금 사람이 다가온다.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핸드폰을 쥐고 있다. 핸드폰 속에는  엉뚱하게도 美女(미녀)라고 이름이 쓰여있는 주소록이 떠있다. 그 남자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죄송한데 번호를 줄 수 있냐고 묻는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웃으며 不好意思( 미안해요, 실례할게요)라고 답한다. 남자는 마치 거절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수긍한다. 샐쭉하게 미안하다고 말한 후 사라진다. 나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고 그는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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