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mma Jeon Oct 24. 2021

3. 꽃을 샀는데 집에 있는 꽃병이 작아서요


매일 타는 지하철 노선에서 상념에 빠지면

구팅(古亭) 역에서 타이베이 신이취 시정 푸(信義區 市政府) 역에 있는 회사까지 가기 위해서는 오렌지색 라인 지하철을 타고 중샤오 신성역(忠孝新生)으로 간다.  다시 파란색 라인으로 갈아타 시정 부역(市政府)에서 내린다.  환승역인 중샤오 신성역에서는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분주하다.  문득 나는 더 이상 여행자가 아니라 현지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외국에서 살면서 일상을 여행자처럼 보낸다면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행 때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방문해야 할 곳, 먹고 느껴야 할 장소를 방문해 감상을 미션처럼 치른다. 1분 1초가 아쉽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가겠다는 집념과 집착이 관광객의 발에 가득 실린다.  반면 1년 이상을 한 곳에서 거주하게 되는 경우 이런 집착은 삶을 이상하게 뒤틀리게 만든다. 여행자의 마음가짐은 어떤 음식이든 지나치지 못하고 꼭 먹어본다거나, 사소한 일상을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게 한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밖에서 쏟아지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을 쓴다. 그렇다 보면 내 일상의 발란스는 무너지고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둥둥 떠다니게 된다. 그래서 외국에서 산다면 일상은 여행이 아닌 생활로 다루어야 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건강한 생활이 우선이다. 신선한 식재료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지역의 특식을 매번 챙겨 먹지 않는다. 새로운 곳에 놀러 가기보다는 자주 가는 단골 카페에 들려서 일기를 쓰거나 사색에 빠진다. 사전을 끼고 중국어 책을 공부하며 읽기보다는 한글로 쓰인 책을 읽어 온전히 내용을 이해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감에도 눈, 코, 귀는 새로운 것을 보고 맡으며 듣게 되어 있다. 그 피로함으로도 충분하다.



여행자는 꽃을 사지 않는다.

발걸음이 가볍다. 주말에만 열리는 다안 꽃 시장(大安花市場)에 가는 길이다. 다안역(大安) 6번 출구에서 나와서 신호가 긴 교차로를 건너야 한다. 교차로의 파란불이 켜지기를 기다리면서 건너편의 다안 공원을 바라본다. 아침에는 비가 와서 우울한 날씨였는데 오후가 돼서 해가 나오니, 사람들이 공원에 가득하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 공원의 러너들,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까지. 나는 교차로를 건너 꽃 시장 가장 초입에서 꽃 3 묶음을 100nt에 구매한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도 가격은 동일하다.


여행자는 꽃을 사지 않는다. 내일모레면 비행기를 타고 여행지를 떠나야 하는 여행자의 짐은 가벼워야 한다. 나는 꽃을 살 수 있는 날에 감사한다. 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며 혼자만의 우월감을 느낀다. 나는 관광객에 지나지 않고 현지에 녹아들어서 삶을 향유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집에 가지고 온 싱그러운 튤립과 백화들이 행복을 100%로 끌어올린다.  내 방의 화병에 들어가지 않는 꽃은 플랫을 같이 쓰는 룸메이트를 위해 부엌과 거실에 놓아둔다. 백화의 진한 향이 부엌에 감돈다.  100nt의 돈으로 나는 행복을 룸메이트와 나눈다.  마침 집에 돌아온 헬레나가 웬 꽃이냐고 말을 건다.


"꽃을 샀는데 방에 있는 꽃병이 작아서요"





자극과 경험이 쏟아지는 환경에서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기 쉽지 않다. 나는 자주 일기를 써서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는 습관을 가졌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취미는 생활을 유쾌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평일에 한번 스윙댄스 수업을 가고 금요일 밤에는 스윙댄스 소셜에 가서 춤을 추었다.  토요일에는 타이베이 북쪽에 있는 양밍산을 혼자 올랐다.  일요일에는 월요일 위클리 미팅을 준비하고 책을 읽고 세탁을 했다.  


나 스스로 리듬감 있고 일정한 패턴이 있는 일주일을 즐기기 시작했다. 일주일은 차곡차곡 쌓여 한 달, 그리고 몇 년의 패턴이 되었다. 아무도 규칙 있고 건강한 삶을 종용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고 있었다.  게으르고 자기기만적인 나에게 놀라운 변화였다.



대학교 교환학생으로 스페인에서 잠시 공부를 했다. 처음 마드리드 땅에 떨어졌을 때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23일이었다. 마드리드에서 맞이한 연말은 환상적이었고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시내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등이 장식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들떠있었다.  한국의 가을 정도 날씨이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춥다고 목도리를 매고 털모자를 썼다.


새로운 공간에 뚝 떨어진 나는 이전 세계와 다른 모든 것을 흡수하고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방인 삶이란 게 그렇듯이 불현듯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두려움을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결로 이해했다. 처음 얻었던 아파트는 마드리드 시내 중심에 있었다.  레티로 파크(Retiro de Parkco)로 건너편에 있는 플랫이었다. 레티로 파크에는 피크닉을 하러 오거나 호수에서 오리배를 타거나 색소폰을 부르러 오는 이들이 있었다.


꽤 쌀쌀하던 저녁에 몸을 웅크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멀리 5층 정도 되는 아파트 내부가 불이 훤하게 밝혀져 안이 들여다 보였다.  아파트 안에는 노란빛이 새어져 나오고 있었고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등이 반짝반짝 점등되어 빛나고 있었다.  집안에는 따뜻한 감정이 가득 흐르고 있을 듯했다.  나는 골목의 초밥집 안을 살짝 돌아본다.  가게 안에는 나랑 비슷한 아시안이 나를 반기지 않을까 기대한다.  마드리드의 그 거리들이 너무나 그립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일상이 혁명이었던 그곳이 그립다.  


대만에서 맞이한 연말은 낭만적인 몽상이나 두근거림은 없다. 그저 익숙해진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어제저녁에는 자전거를 타고 아기자기한 상점이 있는 스다 야시장 근처 골목을 돌아다녔다.  아파트에서 구팅역까지 갈 때 나는 큰길 대신에  한 사람만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으로 간다. 나는 이곳을 고양이 골목으로 명명했다.  고양이 골목을 지나가면 자주 노란 고양이가 그루밍을 하는 것을 본다.  햇빛은 따뜻하고 낡았지만 분위기 있는 골목이 있다.  타이베이 곳곳에 다른 색깔의 추억이 진하게 매겨진다.



이전 02화 2. 고난의 파도를 넘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