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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Jeon Oct 24. 2021

2. 고난의 파도를 넘어



그런 날이 있다. 세상이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약한 일을 쏟아내는 날.  하나 같이 모두 고의 없이 벌어진 일이었지만 바닷가에 서 있던 여행객이 파도를 맞는 것처럼 삶이 삐끄덕이며 흘러갔다.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닌데 중국어 수업에 지각했다. 꾸물거린 내 잘못인데 왠지 억울하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 질문에 대답을 못 해 버벅거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인턴으로 일하는 회사에서는 지난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클라이언트가 계약을 취소했다. 마지막으로 퇴근 후에 거실에서 한국어 과외를 해주고 있는데 옆 방에 사는 톰이 어떤 여자와 섹스를 하기 시작한 건... 정말 지독한 악몽이었다. 톰은 매번 다른 여자를 데려왔는데 이날은 방에서 공용 욕실을 오가며 난리를 쳤다. 욕실의 타일을 타고 거실까지 민망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일주일 한번 대만인 루오팅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와 학생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척 수업을 계속했다.  고난의 파도들은 나를 사정없이 덮치고 있었다.


대만에 온 뒤에 종종 폭식할 때가 있었다.  갑자기 편의점이나 빵집에 들어가서 아무 음식을 잔뜩 사서 가지고 돌아와 순식간에 먹어 치우곤 했다.  나는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폭식했다.  이를테면 수 중에 있는 돈이 오직 1000 NT(한국 돈 37,000원)만 있는데 월급날까지 열흘이나 남은 상황이 그러했다. 새해를 중국어로는 콰니엔(跨年:해를 뛰어 넣었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해피 콰니엔(跨年快樂)이었지만 나는 정말 가난했다.  모아둔 돈도 모두 쓰고 인턴으로 일하는 회사에서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준다. 돈이 모자라 저녁에는 한국어 과외로 투 잡을 뛰고 있었다.  압박이 심한 상태에서 나는 나름대로 호흡을 가다듬고 인생을 통제하기 위해 힘쓴다. “퇴근 후에 Imperfect cafe에 가서 맛있는 녹차 디저트를 먹으면서 정규직 면접 준비와 중국어 공부를 하자” 고 되뇐다.  다행히 교통카드에는 돈이 남아있다.  마침 카페에 들어섰을 때 나는 라인 메시지를 받는다. "선생님 오늘 수업 잊어먹은 건 아니죠?”  마침 카페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녹차 디저트 세트가 다 떨어졌단다. 학생에게 미안하다며 답장하고 허무하게 카페를 나와버렸다.


허기진다.  충동적으로 근처에 있는 빵집에 들어가 가지고 있던 돈의 절반을 빵 구매에 써버 린다. 나는 세 개의 빵을 손에 들고 우걱우걱 먹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무릎은 시큰하고 급히 먹어 버린 빵은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은 허공에 날아갔고 몸에서는 땀이 잔뜩 난다. 현재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일은 몇 안 되는 돈 뿐이었다. 부족한 중국어 능력이나 카페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디저트, 손에 닿지 않는 정규직의 기회 등과 달랐다. 월급날까지 남은 9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면서도 지금 소비를 하면 빵은 확실한 즐거움을 줄 테니까.



생활고에 시달리던 나는 회사에서 악착같이 다른 기업과 계약을 따냈다. 그리고 뻔뻔하게 사장한테 춘절(대만의 설날) 보너스를 달라고 요구한다. 춘절 보너스는 정규직에만 지원된다. 인턴 나부랭이가 하는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사장은 보너스를 주었고 그해 겨울을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다.




대만의 인턴 자리는 104에서 구할 수 있다. 나는 Korean, Korean speaking, Korea marketing 등의 키워드로 일자리를 헌팅했다. 대만에서 한국인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첫 번째 이유는 외국인 워킹 비자 조건을 위한 최소 연봉을 감당하고 싶어 하는 회사가 많지 않다.  비자 준비도 복잡하기 때문에 인사팀이 있는 규모 있는 회사가 보통 외국인을 고용하고 싶어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한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대만 회사의 숫자 또한 많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의 고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턴은 정규직보다는 일을 구하기 쉬운 편이다. 3개월~6개월 동안 Temporary로만 일할 인턴을 구하고 정규직 전환에 대해 고용인이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턴을 통해 대만 회사 분위기를 익히고 좋은 스킬들을 배울 수 있어 인턴 경험을 추천한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 등으로 대만에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다면 104를 통해 인턴을 구하길 권한다.




2016년에 대만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절친이 대만에서 중국어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 얼굴 보려고 대만행 비행기를 탔다. 나는 운이 좋게도 해외를 구경할 기회가 많았다. 대학생 때까지 쉴 틈 없이 여기저기 세계를 잘도 돌아다녔다. 인도, 네팔, 모로코, 서유럽지역, 터키, 호주, 동남아시아를 여행했고 세상 구경을 나름 해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국과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중화권 국가에 대해 큰 기대가 없었다. 유럽의 화려하고 우아한 건축물도 없을 것이고, 모로코나 인도처럼 나를 놀라게 해 줄 이국적인 문화도 없으니까. 그런데 웬걸 나는 대만에 2박 3일 여행을 가서 그곳에 빠져들고 말았다.


대만 사람들은 외형과 내형면에서 동아시아인들만이 가지는 동질감이 있었다. 겉모습은 한국인인 나와 아주 비슷해 보였는데, 사람들은 더 나이스하고 여유 있으며 순박했다. 이곳에서는 타인과 다르다는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도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무엇보다 대만 사람들의 타인에 대한 존중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당시에 여름인지라 짧은 바지와 민소매를 입고 다녔지만 아무도 내 옷차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같은 옷차림으로 인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무례한 눈빛들이 나를 쫓아다녔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아쉬움과 씁쓸함을 느꼈다.


한국에 돌아와 나는 무턱대고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국어를 하나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조, 병음 읽는 방법부터 시작했다.  중국어를 공부하면서도 대만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중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사람은 대만에서 생활할 수 없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대만이 좋고, 중국어를 잘하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나를 당시 원어민 선생님이 알아보았다. 중국 원어민 선생님은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한국 유학을 오고 한국 기업에 취업까지 했다가 중국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다.  외국 생활을 하고 있는 원어민 선생님은 터무니없이 용감한 나의 도전을 응원해주었다.  점점 대만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대만 기업에서 한국인 인턴을 찾는다는 공고를 발견하고 나는 무턱대고 지원한다.


찾고 있는 한국인 인턴 포지션은 다행히도 영어로 근무가 가능했다.  나는 영어 cv와 내 이력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작성하여 지원을 했다. 운이 좋게도 서류가 합격을 하게 되었다.  나는 뭐에 홀린 듯이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하고 면접을 보기 위해 다시 대만 땅을 밟았다. 정직원도 아니고 인턴직이고, 면접이 붙을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가족들한테도 3개월 뒤에 올 거라며 작별 인사를 청했다. 그때는 1년이 지나서야 한국에 돌아가게 될 줄 몰랐다. 면접을 본 회사는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스타트업 회사였다. 대표도 30대 초반이고 직원들도 모두 젊어서 회사보다는 대학교 캠퍼스 느낌이 나는 회사였다. 나를 면접 본 글로벌팀 팀장은 미국인이었는데, 약 20분 정도 영어면접을 보았고 면접이 끝날 때 붙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 합격 메일을 받았다. 그렇게 무모하지만 익사이팅한 나의 대만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급이 180대만 달러( 한국 돈 6800원) 였는데, 놀랍게도 이 돈으로 월세도 내고 생활비까지 충족했다. In flow, 나는 기분 좋은 플로우를 타기 시작했다. 오직 내 힘과 기운과 행운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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