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mma Jeon Oct 24. 2021

9. 나에게 애정의 눈빛을 보내는 곳으로 발을 뻗는다면


대학생 시절, 나는 스페인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동기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으니 스페인어학과도 아닌 내가 마드리드에 위치한 대학교( Universidad Rey Juan)에 지원한 것은 아주 엉뚱한 일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에 나는 13시간이 걸리는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밤 10시가 되어 도착한 겨울밤 마드리드 거리에서는 호기심과 두려움의 냄새가 났다. 본격적으로 정착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모든지 혼자서 해야 했다.  폴더용 2G 폰을 사서 핸드폰 번호를 만들고, 초보 스페인어로 렌트할 방을 찾았다. 방을 찾기 위해 전화를 걸 때마다, 주인이 영어를 할 줄 알기를, 아니라면 부디 내가 그의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랐다. 당분간 5명이서 사는 음침한 셰어 아파트먼트에서 살기로 했다. 마땅한 음식이 없어 버거킹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가의 어느 아파트 창문 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외로워서 크리스마스트리와 오렌지 조명이 비추는 집 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골목에는 작은 초밥집이 있었는데, 혹시 그곳에는 나를 닮은 동양인이 있지 않을까, 나와 동병상련하는 처지가 아닐까 괜히 기대하며 안을 살피기도 했다.


12월 31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해 nuevo ano를 혼자 맞이하기 싫었지만, 친구도 가족도 이 땅에는 없었다. 그때 마침 은인처럼 아르헨티나 여자아이가 옆 방으로 이사를 왔다. 쾌활하고 엄마처럼 나를 챙겨주는 마리아는 새해 카운트를 하는 마드리드 솔 광장( Plaza de Sol )으로 나를 데리고 가주었다. 한국과는 비교 안되게 따뜻한 겨울이었지만, 모든 게 새로워서 잔뜩 긴장했던 나에게는 가장 추웠던 새해로 기억된다.


외로운 영혼이었던 나는 좋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레이더가 있었던 모양이다.  연이 닿아 현지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고 웃고 울며 지냈다. 외롭고 기꺼이 타인의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 개구쟁이 '후안'과 그래픽 디자이너 스쿨에 다니는 '호세', '안', '실비아'는 모두 현지 마드리뇨( Madrino)였다.  우리는 주말마다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가거나, 젤라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수다를 떨거나 할 일 없이 하루 종일 마드리드 시내를 걸어 다녔다. 광장에서 시위가 있을 때면, 호기롭게 노숙을 하고 시위대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이때 나는 대학교 수업은 자주 빼먹으면서도 사설 스페니쉬 랭귀지는 빼먹지 않고 갔다.  교환학생 동기들하고는 으레 예의를 위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나면,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스패니쉬 랭귀지 수업 친구들과는 끈끈한 무엇인가 있었는데, 다들 각자의 이유로 스페인에 정착을 하려는 비교적 야생 성향의 친구들이었다.  영국에서 스페인 남자 친구와 결혼하여 마드리드로 온 중국인 미셀, 이탈리아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온 카를로나, 스패니시 아내의 출산을 위해 마드리드에 온 호주 남자 존, 그리고 익살스러운 나움 선생님.


오전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작은 골목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는 10유로짜리 Menu del Dia (오늘의 식사)를 판다.  골목 테라스에서 2-3시간 수다를 떨며 밥을 먹곤 했다.  서로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봐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안아주었다. 헤어질 때면 까를로 나는 늘 허그를 해주고, 볼에 잔뜩 뽀뽀를 해주었다. 마드리드는 점점 떠나기엔 애정을 잔뜩 담은 도시가 되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 내 생일도 다가오고 있었다.  친구들과 굿바이 파티를 하고 싶었다.  그때 살았던 곳은 아이들이 모두 출가하여 비어있는 방을 할머니 마가리타가 내어준 곳이었는데,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우아한 아파트였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이 그렇듯이 좁고 낑낑대며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1층에서는 다정한 관리인이 살았고, 이웃끼리 부활절 선물을 주고받는 아파트였다. 마침 한국인 친구가 나를 만나러 마드리드에 왔다. 친구와 함께 마드리드 한인 마트를 찾아 김밥 재료와 냉동만두를 사 와 음식을 준비했다. 할머니 마가리타는 나를 위해 근사한 비프 웰링턴과 아스파라거스 요리를 준비해주었다. 오후 5시, 내 베스트 프렌드 후안이 먼저 홈파티에 도착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거실에서 후안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선하다. 하나둘씩 친구들이 와인과 맥주를 들고 찾아왔다. 초대한 20명의 친구들이 모두 와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날은 내 생애 처음으로 축복받는 기분이 든 날이었다. 밤이 깊자 친구들과 다 같이 광장으로 가서 동그랗게 모여 수다를 떨었다.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 나는 꺽꺽 울었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는데, 지금 하는 굿바이 인사가 영원한 인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이곳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곳인 것을 알고 있지만 스페인에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도시를 떠나기 싫어 밤새 나는 울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마음속이 쓰리고 아팠다.  열병을 앓았다. 마드리드에서의 삶이 그리워져서 일부러 옛날 사진을 보지 않았다.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때의 추억을 마음 깊이 묻어두고 한동안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스페인에서의 삶은 꺼내기 어려운 타임머신이 되어버렸다.


몇 년 뒤에 나는 대만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직장을 구해 거주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겪었던 좌충우돌 정착의 과정과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만나는 과정을 다시 겪었다.  스페인 때와 달라진 것은 ‘이곳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계속 살아보기로 다짐한 것이다. 아래 글은 정식 워킹 비자를 받고 일을 시작했을 때 써놓은 일기다.



꿈처럼 타지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 때, 나는 몇 년 전 스페인에서의 나를 떠올렸다. 스페인에서의 삶은 유한한 것이었다. 6개월의 교환학생이란 정말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 나에게 스페인 사람들은 여기 머물러, 내가 결혼 비자를 줄게, 너도 TV 속 정착한 사람처럼 될 수 있어. 이렇게 항상 말해왔다. 나는 그 말을 쓴웃음으로 받으며, 그 말을 진짜 삶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항상 행복의 일부분을 그곳에 두고 다니고 살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 입에서 나와 흩어진 그 말들은 나의 삶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없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미래였다. 나에게 삶이란 한국으로 돌아가 직장을 구하고 여느 한국인처럼 살아가는 것이었으니까. 그 밖의 삶이란 도저히 상상 밖의 것이고, 담장 밖의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는 게 인생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오히려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삶이란 퍼즐이나 게임처럼 한 단계씩 맞춰가거나 레벨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어렸던 내가 예상하고 생각한 미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삶은 내가 어디로 향해 발을 뻗느냐에 따라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발을 뻗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두려워한다. 하지만 삶은 살아지는 것이고, 발을 뻗기만 해도 나는 정신을 차려보면 정말 갈 수 없었을 것 같은 그곳에 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즘 매일 생각한다. 스페인 마드리드 골목에서 다시 늦은 점심을 오랫동안 먹으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 것이고, 카나리아 섬에서 유영을 하고 하이킹을 할 거라고.

나는 그 속에서 보다 자유로워져서 내가 두고 온 행복을 만나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마치 내 모든 행복을 그곳에 두고 왔다 다시 찾은 것처럼 기뻐하며 방방 뛸 것이라고. 오늘도 나는 기필코 가슴이 요동치게 만들고 나에게 애정의 눈빛을 보내는 곳으로 발을 뻗는다. 발을 뻗고 걷다 보면, 상상하던 그 행복이 정말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현지 커뮤니티에 녹아들면 타국 생활이 한 층 유쾌해진다. 타이베이에 플랫을 구할 때였다.  다안 지역에 마음에 꼭 드는 셰어 아파트를 발견했다.  룸메이트를 구하는 소개글에는 아래처럼 적혀있었다.


"테크 기업에 일하는 Product Manager 두 명이 거주합니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친밀한 하우스 파티를 여는 것을 좋아합니다. LGBT Friendly! "  


스타트업과 고양이, 하우스 파티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인 집이었다.  나는 바로 집주인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네가 올린 포스트 잘 보았어.  소개글을 보고 나와 공통점이 많은 사람으로 느껴져서 반가웠어! 나는 스타트업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한국인이야. 아쉽게도 나에게는 플랫 비용이 비싼 것 같아. 다른 곳을 더 찾아보고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렌트비가 비쌌기 때문에 결국 나는 해당 플랫에 조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시지를 받은 집주인 퐁퐁은 나를 흥미롭게 생각했고 다음 하우스 파티 그룹에 나를 초대했다.  페이스북 메신저가 인연이 되어 퐁퐁은 많은 대만 친구들을 나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퐁퐁은 대만에서 가장 높은 옥산(玉山)에 오르는 등산 모임에도 나를 초대해주었다. 3박 4일 동안 산 위에서 지내야 했고 산 초입까지도 오래 운전을 하고 들어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챙겨야 할 장비도 많았고 산장 예약 등 골치 아픈 일 투성이었다.  옥산은 신청을 하고 통과를 해야만 입산할 수 있는 산이었고 외국인이 등산객 리스트에 포함될 경우 통과 확률이 높아졌다.


내가 옥산 등산을 포기하려고 할 때 친구 다니엘이 해준 말이다.

一起完成這個難忘的回憶 : 우리 함께 이번에 해내면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이전 08화 8. Being Loved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