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mma Jeon Oct 24. 2021

8. Being Loved




오늘도 온 세상이 나를 사랑해주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타이베이 시내를 걸었고,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과 저녁과 디저트를 함께 했다. 山草라는 약초 디저트를 먹었는데, 우유에 타서 먹으면 하얀 우유가 금방 달콤한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햇빛은 적당히 따뜻했고, 중국어로 말을 핑퐁처럼 주고받았으며, 별일 없이 나는 행복했다. 나를 찾는 메시지를 한국에서 받았고, 내가 아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한 듯 보였다.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 전범위적이고 커서 결국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오늘 받은 이 사랑을 주체 못 하고 짝사랑하는 남자 집 근처를 서성거린다. 우연히 그를 맞다 드리면 마음속에 넘치는 사랑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랑을 아무에게도 주지 못한 채 집에 오면 아쉬움을 간직한 채, 사랑.. 사랑.. 사랑.. 하며 되뇌는 것이었다.



헨리, 나의 헨리

헨리는 스윙댄스 기초반에서 만났다.  중샤오 신성의 화산 1914 문화지구에서는 토요일마다 스윙댄스를 추는데 우연히 나도 체험수업을 듣게 되었다.  스윙댄스에 재미를 느낀 나는 본격적으로 스윙을 배우고자 결심하고 수업을 등록하게 되었다.  수업 첫째 날 헨리를 보자마자 나는 그와 언젠가 사귀게 될 것을 예상했다. 헨리는 왁스로 머리를 위로 넘기고 반바지를 입고 수업에 왔는데 나는 어린 교포 대학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장난스럽게 '너는 졸업은 했니?'라고 물어봤다. 헨리는 갑자기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사업을 하기 위해 캐나다에서 대학교 자퇴를 하고 대만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헨리와의 첫 번째 데이트는 스윙댄스 연습을 맞추고 중산 역 앞 공원에서 저녁을 먹은 것이었다. 이때 우리 대화가 얼마나 즐겁고 케미스트리가 넘쳐나던지!  우리는 대만이라는 행성에 떨어진 외계인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신나게 빠져들었다.



제이슨의 데이트

마케팅 부서는 오후 1시가 되면 밖에서 도시락을 사 와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오늘 점심시간의 화두는 어젯밤의 제이슨의 데이트였다.


“우리는 새로 연 미츠비시 백화점(新光三越)에 갔어”

“아 그 중산 역에 새로 연 거 말이야?”

“응 그리고 소개팅녀가 디저트를 아주 좋아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아주 많은 디저트를 먹었지”

"좋은데?"


동료들은 점심으로 사 온 도시락을 씹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그에게 호응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데이트는 했는데, 대화는 empty였어”


그때 아담이 끼어들어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전에 티나가 얘기했던 거 생각나? 감정이란 것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고."

그는 손으로 올라갔다가 급 떨어지는 그래프를 그려 보인다.


"그러니까 대화가 재미없었다고 해도 그녀에게 키스해 ”


나도 입속에 닭고기를 굴려가며 생각을 한다.


감정이란 것은 정말 그렇게 없어져버리는 것일까? 그럼 헨리와의 감정도 그냥 사라져 버릴까? 헨리 때문에 며칠 밤을 뒤척이고 긴장이 된다.  나를 변화시키는 큰 힘이 만약 타이밍이 안 맞아서 사 그라 버린다면 너무 씁쓸할 것 같은데...


행복해지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업무를 하고, 좋은 사람들과 팬시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행복하지는 않았다. 불행하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는 정도였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렇다면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요소를 찾아보고, 삶에서 바꿔나가 보자고 생각했다.


살을 빼면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어 PT를 받게 되었다. 몸이 피곤한 날에는 8만 원짜리 임파선 마사지도 많았다. 식물과 가까이 지내면 나아질까 싶어 사무실 책상에 화분을 놓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아주 미세하게 행복은 잠깐 나에게 달라붙은 듯했으나 금방 휘발되었다.


그런데 헨리를 알게 된 이후로 시종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날아갈 듯 행복해졌다. 이렇게 확실한 행복의 방법이 있다니. 이건 정말 불공평한 사기 수준의 인생의 치트키가 아닌가!  내 얼굴에 나타난 슬픔을 볼 때마다 동료 아담은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것은 연애라며, "남자 친구를 만들어! 남자가 필요 없다면 여자는 어때" 라며 나를 위로해주곤 했다.


아담의 실없는 말이 해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황했다. 이렇게 단순한 해답이라면 다들 왜 버둥거리며 사는지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라면 바로 연애라는 답을 고르면 되는 거잖아!  




사랑에 빠지면 연인을 사랑스럽게 관찰하고 좋은 점을 발견하는 나는 헨리의 구석구석을 벌써부터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헨리의 말투, 행동, 생각, 취향에서 묻어있는 대만과 캐나다 두 나라의 색채를 좋아한다. 장난스럽게 왁스로 쏟아 올린 머리스타일도 좋아한다. 솔직하고 자기 스타일이 있는 점도 좋아한다.


데이트 1

날씨는 투명하고 맑았다. 위엔 산부터 니야 오토 우 공원까지 자전거로 달릴 때 마치 ‘자전거 탄 소년’ 영화 포스터 속 장면이 된 기분이었다. 햇빛은  강하고 뜨거웠지만 강변에서 바람이 불었다.


장난기가 넘치는 헨리는  앞에서 자전거를 타며 까불고 말을 걸고 웃고 건들거리고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화창한 날씨에 이렇게 좋은 풍경을 보며 자전거를 타고 있다니 행복하다. 행복이란 것은 아주 명백해서 yes or no처럼 나에게 확실하게 답을 주는 것임을 알았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처음에 만나면 부딪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날카롭던 가시를 넣어두고 서로를 탐구하며 만지며 껴앉고 서로를 느낀다. 진지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낄낄대며 웃어댔다.


데이트 2

이상하다. 헨리랑 만나는 날은 날씨도, 타이밍도, 분위기도 모두가 완벽하다. 오늘은 爱爱 페스티벌에 왔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스탠딩 자리에서 뛰면서 정신없이 음악을 들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제일 힙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동력화차(動力火車)라는 가수가 나온다. 헨리가 대만에서 캐나다로 이민 가기 전에 나온 가수라고 한다.  헨리는 다른 대만 노래는 몰라도 동력화차의 노래의 가사는 알고 있다며 신나게 가사를 따라 부른다.  페스티벌에서 신나서 방방 뛰며 리듬을 타며 춤을 추는 나가 놀랍기도 하는데, 헨리 옆에서는 정말 내 자신의 모습이 나와 신기하다. 헨리가 궁금하고 흥미로운데도 긴장해서 내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과도하게 나를 바꾸려 한다거나 꾸미려고 하거나, 과장하려고 하지 않는다.



정규직 오퍼를 받고 조인한 회사에서 행복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살갑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나의 on-board를  환영하기 위해 내 자리에 초콜릿 과자 타워를 만들어 놓는 귀여운 동료였다.  마케팅 부서의 팀원은 나를 포함해 10명이었는데 시리즈 B를 받은 스타트업에서 많은 수의 마케팅 직원과 근무할 수 있는 것만 해도 큰 행운이었다. 팀원들은 모두 자율적이고 평등하게 근무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제약이 없고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가장 많이 소통한 팀원은 홍콩 마케터 Alice였는데, 새로운 광고 집행을 할 때나 KPI를 잡을 때 서로 같이 고민해주고 결과를 공유하는 사이였다. 중국어는 메일과 같은 문서 형태를 제외한 실생활에서 경어를 쓰지 않는다.  마케터팀 리드에게도 그냥 영어 이름으로 부르고 친구처럼 의견을 교환했다. 이때가 팀원들과 서로 인 스파이 링 받으며 가장 신나게 일하던 시기였다.  


대만 회사는 춘절(春節: 중화권의 설날)이 오기 전 12월~1월 사이에 모든 사원이 함께 웨이야를 치른다. 보통 2박 3일로 함께 이란, 자이 같은 지역의 호텔을 빌려 같이 수학여행을 떠나는 느낌이다.  두 번째 밤에 웨이야 행사에서는 각 부서의 매니저와 대표가 같이 장기자랑을 한다.  평직원들이 재롱 장치를 하는 것이 아닌 비교적 나이 많은 시니어들이 쇼를 준비한다는 게 유쾌하다.  대표가 랩을 하거나 디즈니 겨울왕국 코스프레를 하고 노래를 부르거도 했다.  쇼가 시작되면 직원들은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으로 영상 남기기에 바쁘다.


웨이야의 백미는 상품 뽑기(抽獎)다. 1등 상품은 해외 비행기 티켓, 현금,  1주일 휴가 등이 있다.  꼴등은 영화 티켓, 와플 메이커 등의 소소한 선물이다. 참여했던 첫 번째 웨이야에서는 일본 직원이 1등 상품으로 한국행 비행기 2장을 받았다. 일본 직원은 집에 가고 싶다며 2등 일본 비행기 1장으로 바꾸기도 했다.  웨이야는 함께 술을 기울이며 왁자지껄 수다를 떠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회사 동료들이 퇴사를 할 때도 얼굴 붉히며 떠난 적이 없었다. 다들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기도 했고 퇴사를 졸업이라고 우리끼리 부르기도 했다.  '畢業快樂' 졸업 축하해.



이전 07화 7. Disgraceful Girl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