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려나간 5분의 기억
나는 장을 봐온 저녁 찬거리를 정리하고, 아이들 저녁밥을 챙겨주었다. 같이 식사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밥을 먹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즉석밥을 데우고 냉장고에서 몇몇 찬들을 꺼내 밥상을 차렸다.
밥상을 다 차렸을 땐 아이들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저마다 열심히 그루밍을 시작했다. 한티는 그루밍에 열심히인 편이 아니어서 그루밍을 하다 말고 밥을 먹는 내 모습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나와 아이들이 사는 공간은 14평 정도의 옥탑방이었다. 이전 집은 7평이 채 되지 않아 한티와 버티의 싸움이 잦았고, 고양이 세 마리가 조금 더 여유롭게 지내기 위해선 이전보다 더 넓은 집이 필요했다. 지하철 역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집 안에 계단이 있다는 것과 테라스를 혼자 쓸 수 있다는 점은 나와 아이들에게 큰 장점이었다. 가끔 날아 들어온 벌레가 있다는 것도 아이들에게만큼은 장점이라고 해야 할까.
집이 특이한 구조라 조금 더 설명하면, 집 현관문을 열고 계단 12개 정도를 또 올라야 실제 현관이 나왔다. 현관 바로 앞은 거실과 부엌이 이어졌고, 부엌 싱크대에선 벽을 하나 두고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 입구엔 세탁기가 있었다. 그리고 싱크대에서 마주 보는 방향엔 큰 방이, 미닫이 문을 두고 작은방이 이어진 구조였다. 투룸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화장실을 제외하곤 여닫는 문은 없어, 큰 분리형 원룸과도 같은 집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가져온 도복을 빨기 위해 세탁기를 돌렸다. 도장의 땀냄새가 깊게 밴 도복과 옷가지 몇 개를 더 빨아야겠다 생각해 빨랫감을 찾는 동안 한티와 버티가 따라다녔다. 로티는 밥을 줄 때엔 엄청난 애교를 부리지만, 밥을 다 먹었기 때문에 제일 작은 방 침대 위에서 그루밍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샤워와 양치질을 하고 나오니, 항상 그랬듯 한티 혼자 화장실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한티는 내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항상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내가 나올 때마다 항상 칭찬을 바라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버티는 로티에게로 가있는 모양이다.
"한티, 누나 화장실 무서워할까 봐 기다려줬구나!"
하며, 한티를 번쩍 들어 안고서 침대로 향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5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밀려있던 설거지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났고, 한티와 버티는 나를 따라 나왔다.
오후 9시. 설거지를 하는 위치에서 살짝 왼쪽으로 몸을 기울이니 세탁기 위에 한티와 버티가 올라가 있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한 번씩 몸을 기울일 때마다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설거지를 끝내고 간식을 줄거란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같아 눈을 마주하다가 설거지로 시선을 돌리며,
“누나 이거만 끝내고 같이 놀자~! 간식은 이따가~”
라고 말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퉁-퍽!
세탁기에서부터 무언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올라가 있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세제통 소리인가. 한티나 버티가 뛰어내려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낯선 소리라 생각해, 수도꼭지를 잠그고 세탁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티가 떨어져 있었다. 세제통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뛰어내린 게 아니라, 한티가 떨어져 있었다. 처음엔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고 생각해 물기 묻은 손을 옷에 닦으며 세탁기 앞으로 달려가 한티를 안고서,
"한티, 괜찮아?"
라고 하는 순간 한티의 몸이 엄청나게 날뛰었다. 급성발작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사실 그 상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조각나 있다. 무언가 떨어진 소리. 그것이 한티가 떨어진 소리라는 걸 알아채고 달려간 나. 한티에게 정신 차리라고 울부짖으며, 의지와 상관없이 날뛰는 한티의 몸을 꽉 끌어안고서 진정시키려던 나.
여느 때처럼 한티와 세탁기에서 놀다가 난생 그런 한티의 모습을 처음 본 버티는 내 품의 한티에게 하악질을 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버티의 발길질은 내 옷을 찢을 만큼 거셌고, 내 왼쪽 배가 결국 버티에게 베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이 든 순간 품에 있던 한티의 몸에선 힘도, 숨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떨어져 한티의 얼굴을 보니, 눈을 뜬 채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보다. 꿈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악몽이 이렇게 비현실적이었던가.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 계속되는 버티의 발길질로, 한티를 잠시 내려놓고 버티를 안아주었다.
"버티야, 그만. 형아가 떠났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버티를 연신 품에서 쓰다듬어주다 작은 방으로 향했다. 작은 방엔 내 울부짖는 소리가 무서웠는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벌벌 떨고 있는 로티가 있었다. 나는 버티와 로티가 방에서만 있을 수 있도록 미닫이 문을 닫고, 다시 세탁기 앞으로 향했다.
몇 시지. 오후 9시 5분.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2021년 3월 10일, 일곱살이 된 한티는 그렇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