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 말고, 진짜 안식
미하일 엔데의 소설 <모모>를 좋아한다. 사람들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시간도둑과 가진 건 시간밖에 없는 소녀 모모의 싸움을 그린 소설인데, 한동안 인생책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아꼈다. 모모로 살고 싶었지만 결국 시간도둑에게 잡혀 살았던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다.
모모에게 시간은 삶이다. 그녀는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이다. 시간을 아끼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자신 앞에 있는 이들에게 집중한다. 놀이도, 대화도 모모와 함께 있으면 진정한 의미를 찾는 듯 보인다. 그 반대편에는 시간도둑이 있다. 회색 신사 무리인 이들은 지금 시간을 아껴야 나중에 잘 사는 인생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 아낀 시간은 매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시간도둑들이 차곡차곡 빼돌려 모으기 때문. 이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목적 없이 생산적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굴린다. 이들은 심지어 여가시간마저도 ‘잘’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한다.
이 소설 속 사람들의 모습이 나와 겹쳐 보여 그렇게 끌렸었나. 나 또한 생산적으로 사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기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내 머릿속을 항상 지배하고 있었고 나는 시간이 버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무용한 일상이 너무나 힘들었다. 즉 생산적이지 못한 시간을 못 견뎠다. 타고난 기질도 벼락치기에 최적화되어 있어 그간 내 삶은 온 힘을 쏟아부어 생산성을 최대로 끌어올린 후 탈진하고, 다시 달리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쉼의 의미가 변질되었다. 나에게 쉰다는 건 어떤 걸 성취한 이후의 보상이었다. 혹은 탈진한 후 다시 달리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었을 뿐이다. 프로젝트로 일하는 직장이 잘 맞았고 루틴하게 돌아가는 업무는 견디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는 이 점이 엄청난 장점이었다. 학기 중에 성적을 위해 나를 쏟아붓고, 방학에 잠깐 쉬고 다시 돈을 벌며 나를 쏟아부었다. 그러면 내게는 학점이 남고 통장에 쌓이는 잔고가 남았다. 직장에 다닐 땐 월급과 주위의 인정이 나의 성취였다. 그리고 그 성취는 다시 쉼의 명분이 되었다. 이만큼 해냈으니 지금 이 시기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물론 그 결과들이 나의 삶에 도움이 된 부분들도 많으나 여기엔 중독성이 있어 이런 삶의 모양만을 진리라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난 매번 쉼이라는 이름 아래 지쳐 쓰러져있다가 성취의 영광이 흐려질 때 즈음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성취를 향해서.
이런 나의 특성이 육아와 가사와 만났다. 이는 나를 또 다른 멘붕의 현장으로 데려갔다. 살림은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데 안 하면 티가 났다. 육아는 더더욱 눈에 보이는 결실이 없었다. 아이가 자라는 게 내 개인의 영광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게다가 아이의 성장은 더디다. 끊임없는 굴레처럼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내일인지 모르는 날들이 반복되니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일단 나에겐 이 두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육아는 체력이 안 되어 한동안 현장에서 배제되었고, 살림은 결혼 6년 차가 되도록 큰 관심이 없었으니 집안 풍경은 그냥 바닥 먼지만 없을 뿐 어수선하기 일쑤였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을 청소하고 여기저기를 윤이 나게 닦은들 성에 차지 않았다. 노력을 증명할 수단인 성취가 보이지 않았다. 뚜렷한 성취가 없으니 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종 쉬고 있는 남편을 부러워하고 가끔은 미워했다. 남편의 누워있는 모습이 나에겐 서운함을 넘어 질투로 변질될 정도로. 남편은 그런 시간마저 없으면 못 버틸 정도로 이미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난 그게 최선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못했다. 그저 ‘난 못 쉬는데 감히 네가 쉬어?’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나를 굴리는 만큼 남편도 자신을 굴리길 바랐다. 그의 쉼도 자격을 따져가며 숨 막히게 굴었다.
물론 드러내놓고 말을 하거나 직접 화를 낸 건 아니다. 그러나 남편이 쉬는 시간에 나는 보란 듯이 집안일들을 해냈고 그러면서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비겁하게. 눈치가 보인 남편이 몇 번, 너도 그냥 뭐 하지 말고 제발 누워 쉬라며 제안했지만 속 편한 소리로 치부하며 남편이 기껏 홀로 쉴 시간을 만들어주어도 밀려있(다고 혼자 생각하)는 집안일을 하고는 힘들어했다.
사실 남편이 나를 보며 답답해한 만큼 나도 쉬고 싶었다. 진짜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성취와 성취 사이 탈진과 재충전밖에 겪어보지 못한 나는, 뚜렷한 결과가 없는 이 일상 속에 도무지 쉴 수 있는 틈을 찾아내질 못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진정한 의미의 쉼은 누린 적이 없다는 걸. ‘생산적인 나’라는 우상이 내 삶을 꽉 잡고 흔들고 있었다.
요즘 남편의 느긋한 태도를 보며 육체적으로 쉬는 것에 대해 배우고 있지만, 몸은 누워있어도 머리가 바빠 힘들 때가 많다. 왜 그리 복잡하고 고민이 많은지, 쉰다고 누워도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잠은 멀리 달아나고 몸은 다시 긴장하기 일쑤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쉼은 단순한 육체적 쉼은 아닐 수도 있겠다. 내가 원하는 건 온전한 안식이다. 쉼 그 자체가 목적이며 방향이 되는 시간.
그걸 방해한 건 내 삶의 궤적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며 틀에 벗어난 삶을 살았고, 이후엔 조울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듯 살아야 했다. 성취로 나를 설명하고 포장하며 산 세월이 꽤 길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이 당황스러운 것 같다.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사는데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이 현실이. 바쁘게 살면 성취가 따라와야 하는데, 그게 내 삶에 적용되었던 공식이었는데 아이의 탄생과 함께 와장창 깨져버린 셈이다.
그런 나에게 쉼, 그 의미를 배우는 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진정한 쉼을 누리는 게 무엇인지 계속해서 내게 질문하는 중이다. 그 점에서 또치가 내 롤모델이 된다. 내 품에 안겨 세상 걱정 없이 입을 헤 벌리고 자는 아가의 얼굴은 언제 봐도 평온해 보인다. 안겨있는 아이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지며 생각이 많아진다.
진정한 쉼이란 이런 것 아닐까. 사랑 안에서 걱정할 것 없이 무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지 않고 사랑받는 존재로 머무는 것.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안에서 말이다.
그 시작은 내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겠지. 나를 온전히 수용한다면 지금만큼 남에게서 그 인정을 갈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실수해도 용서하는 것,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죄책감과 원망 대신 나 스스로에게 감사하는 것, 그리고 그 눈으로 남을 바라보는 것이 날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방법 같다.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별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소소한 감사와 변화를 찾아내며 산다면 삶 자체가 쉼이 되지 않을까. 작은 것들을 자축하고 함께하는 이와 나누며 묵묵히 살아낸다면 성취와 쉼이 꼭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나에게 다가온 시간도둑은 ‘증명’이라는 형태로 정당성을 주장하며 내 시간을 야금야금 훔쳐갔다. 성취와 탈진의 사이클 속에 진정한 쉼은 누릴 수 없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치는 그 시간도둑으로부터 날 지키기 위해 내 삶에 찾아온 나만의 모모이지 않을까 싶다. 아무것도 하는 게 없음에도 사랑을 당당히 요구하며 한정 없는 사랑 안에서 깊게 잠드는 우리 아가. 나 또한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 안에서 또치처럼 깊게 안식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