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아이를 낳을까봐 두려워

부모를 판단했던 자식이 부모가 될 때

by 또치맘

고백하자면 나는 결혼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 부정적이었다. 혹시라도 나같은 아이를 낳을까봐.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온 힘을 다해 자녀를 양육한들 아무런 보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 스스로가 부모의 보람이라는 생각이 없었기에.


나같은 아이,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다.




부모님을 미워하던 세월이 있었다.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쪼개어 평가하며 원망하고, 그 행동들이 내게 미친 영향을 곱씹으며 힘들어했던 시간이. 물론 내 부모님은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나와 동생을 양육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들의 미성숙한 양육의 실수 중 어떤 것들은 나의 삶과 우리 관계에 큰 생채기를 남기기도 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사랑이 많은 부모님이었지만 그 사랑이 언제나 자녀만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내 삶의 기반은 부모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 내린 결정에 종종 흔들리곤 했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와 함께 살거나 그들을 위해 온 가족이 이사를 하는 등, 부모님은 주변을 적극적으로 살피며 도우셨고 그 과정에서 나와 동생은 소외되었다.


가족 모두의 삶이 바뀌는 큰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의견을 낼 수 없었다. 결정은 이미 이루어졌고 우리는 따라야 했기 때문에 그 후에 이를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부모님은 귀를 닫았다. 남들을 위한 삶은 본인들에게도 언제나 어렵고 버거웠기 때문에 그들에겐 우리의 불평까지 소화할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불편하고 어려운 마음을 혼자 삼켜야 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나중에 부모님이 고백하기는, 자녀를 자신들이 돌봐야할 대상보다는 함께 누군가를 함께 돌볼 수 있는 동반자로 생각하셨다고.


시간이 지나면서 남들을 위한 배려를 가장한 내 것의 뺏김은 심화되었다. 내 공간을, 내 방을, 내 물건을 뺏겼고, 궁극적으로는 내 부모와 그들의 돌봄을 타인에게 빼았겼다.


그래서 난 부모가 있으나 때때로 없는 것처럼 컸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저항이라도 할라 치면 즉각적인 비난과 꾸짖음이 돌아왔다. 이기적이고 배려하지 못하는, 엄마아빠 마음도 헤아리지 못하는 나쁜 아이라고. 부모님이 내게 기대했던 역할은 헌신적으로 남들을 함께 돌보는 파트너였기에, 그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때마다 실망한 부모님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래서 난 바운더리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자랐다.



나를 지키는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나는 그래서 타인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다. 내 마음을 삼키고 남들의 기대대로 행동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터라 그들의 기대에 무조건 부합해야 할 것 같았다. 만약 거기에 실패하면 당연히 비난이 따라오리라 생각했다. 이전 회사에서 대표님에게 인정받는 순간 공황이 올 정도였다. 이제 저 높아진 기대를 어떻게 맞추나 싶어.


나는 연약한 존재다. 실수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잘못하면 비난 받고 즉각적으로 존재가 부정당했던 환경에서,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의 완벽주의, 실수를 두려워하는 면도 아마 일부는 여기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런 면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우리 부모님은 그 나름의 최선을 다했을텐데 그것을 부정하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내 부모가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부모님과 지난 시간에 대해 대화했을 때 그들은 용기있게 잘못을 시인하고 내게 진심의 사과를 건넸다. 그래서 그때 그들의 최선이 정말 최선이었음을 지금은 인정할 수 있다. 부모도 사람이고, 그래서 실수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이해한다. 시간이 지나 나의 내면도 조금은 성숙해져서 이제는 선한 내 부모를 자랑스러워하는 딸이 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부모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까지.



그래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무서웠다.

내가 부모님을 아예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마음 속 재판에 회부하여 판단했던 것은 분명하고, 그 결과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피고의 입장이 된다는 게 공포스러웠다. 내가 낳고 키운 자녀가 나처럼 자신만의 논리 속에 검사가 될까봐. 그래서 내 행동 하나 하나를 쪼개어 나노 단위로 평가하고, 원망하고, 그 행동의 결과들에 힘들어 할까봐.


다시 말해 내가 낳은 내 아이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봐 너무나 두려웠다. 그리고 부모의 최선이 아이에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내 최선의 행동이 그에게 상처를 줄까봐 참 무서웠다.


그런 연유로 양육에 있어서는 조금도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딸에게만은 한없이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는 말이 핑계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쪼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또치가 내 인생에 찾아왔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내면에는 완벽한 부모,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그 마음이 지나쳐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양육의 궁극적인 목표. 그 모든 노력의 종착점은 ‘나’가 아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양육의 목표는 아이를 홀로 설 수 있는, 건전한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자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싶어 모든 것을 맞춰주다간 진짜 목적인 좋은 사람을 길러내는 것에 실패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혹시라도 실수해서 아이에게 미움받을까 두려웠던 마음은, 한 발짝 더 나아가 무조건적으로 아이의 요구를 수용하는 태도로 변하기 쉬웠다. 하지만 자녀가 날 미워할까 무서워 제대로 훈육하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완벽하게 자신만을 위한 환경에서 자라는 것은 아이에게도 독이기에.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한다는 헛된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가.


어느정도의 좌절과 결핍은 사람이 자라나는 데에 필수적이다. 그러니 부모가 올바른 방향으로 걷고 있기만 하다면 그들의 실수는 때때로 아이가 자랄 양분이 되기도 하더라. 좌절과 결핍으로 인한 성장은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는 있으나, 그런 시간을 통해 사람은 더 깊어지기 마련이다.


또한 자녀는 부모가 어떻게 자신의 실수를 다루는지를 곁에서 지켜본다. 그러면서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흡수한다. 내 부모는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나 또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용기를 배웠다.


그러므로 나의 역할은 또치의 인생 속 모든 실수와 결핍을 차단하는 관리자가 아니었다. 내 역할은 실수와 결핍 속에서 아이가 성장할 때 그 시기를 잘 소화해낼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지하는 조력자겠다. 그 실수의 주체가 누구든지 그 시간들이 아이에게 큰 상처로만 남지 않도록 곁에서 힘을 주는 조력자로 남아있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완벽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은 결국 내 것을 지키지 못했던 그 간의 삶의 패턴과 연결되어있었다. 난 내 인생, 내 삶을 지킬 생각 없이 자녀의 기대에 맞추어 모든 것을 조정하려 했다. 그럼에도 한 편으로는 아이의 진짜 마음을 존중할 여유따위는 없었다. 나는 홀로 생각한 완전함과 기대에 사로잡혀 극성맞게 또치를 대했다. 정작 또치는 내게 어떤 엄마가 되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건 누구를 위한 완벽이란 말인가. 괜찮은 사람이고 싶은 욕심이 아이러니하게도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게 날 막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려면 나에게 먼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를 귀하게 여기고 그 마음으로 너도 바라보는. 나의 실수와 좌절을 용납하고, 그로 인한 인생의 여러 면모를 받아들이는 이가 되어야 남의 실수와 좌절도 똑같이 용납할 수 있었다. 그러니 너그러운 부모, 혹은 좋은 인간은 완벽한 부모, 완벽한 인간과 동의어가 아니겠다.


이 점을 아이가 더 크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다.


또치의 인생 속 실수를 함께 소화하고 용납하는 엄마, 그만의 것인 감정과 울타리를 존중하는 그런 부모가 되길 다짐한다. 지금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아이의 울음을 틀어막기보단 그 의미를 파악하고, 감정을 받아주며 부드럽게 잡아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결국에는 또치가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도 나눌 수 있고, 남들의 것도 존중할 수 있는 이로 크기를 바란다.




내 부모가 자신의 부모보다 더 나은 부모가 되었듯, 나또한 또치에게 내 부모보다 더 나은 부모가 되려 한다. 완벽한 관리자가 아닌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