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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Nov 01. 2019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영화 '조커'를 보고 각종 리뷰들을 찾아보며 한참을 생각해봤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사회의 흐름에 대하여. 지극히 판타지에서 시작된 허구일 뿐인 이야기에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몰두하는 걸까. 영화가 현실을 보여줄수록 사람들은 영화의 현실성에 대해 논하고 싶어 한다. SF영화에 대해 자신의 일상과 비교하는 사람들은 없다. 하지만, 1981년 뉴욕에서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살인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 폭력성과 모방성, 현실성과 인과관계, 선과 악의 경계, 사회의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광대의 웃음 속 감춰진 우울감과 소외감, 분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조롱당하고 짓밟히며 함께 무너진 존재감과 버려졌다는 사실. 그것이 인간에게 삶을 이어가게 하는데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그가 과대망상이었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해서 그의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세상이 원래 가진 자들이 꾸려놓은 프레임대로 흘러왔고 그렇게 흘러간다고 해서 이 미친 세상의 모든 모순이 미화되지는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다.



나는 자꾸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시점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2019년 11월 1일. 나를 둘러싼 혹은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개인이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 세상이 흘러가게 하는 모든 방식과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생각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


어찌 보면 더 괜찮은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과연 더 나은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다. 언제부터 누가 먼저 시작했고 누가 뒤에서 조종하길래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말도 안 된다고 혀를 끌끌 찰법한 일들이 매일같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어쩌면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막장인 데다가 극악무도하기 까지 하다.


소통은 더 활발해지고 있다고들 하는데, 더 많은 마음들이 상처 받기 쉬운 영혼이 되어가고 있다. 남의 취향을 더 쉽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내 취향을 뽐내는 것 역시 어렵지 않게 되었지만,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익명에 기댄 혐오스러운 말들은 인간의 본성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잣대만 될 뿐이다. 


더 무서운 건 이런 것들에 익숙해진다는 거다. 세상을 잘 알게 되고 강해지는 것을 마치 더 좋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처에 무뎌지고 폭력에 무감각해질수록 마음은 더 병들어갈 뿐이다.


존 버거의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혼란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투기 금융 자본은 정부를 노예 주인처럼 활용하고, 전 세계 미디어를 마약 공급상처럼 활용한다. 이 폭정의 유일한 목표는 이윤과 자본 축적인데,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소란하고, 위태롭고, 매정하고, 설명할 수 없는 세계관 혹은 삶의 패턴을 강요한다." 


"공식적으로 말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말해지는 방식이 시민들로 하여금 일종의 기억상실에 빠져들도록 부추긴다. 경험이 지워지고 있다. 과거와 미래라는 지평선도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불확실한 현재에만 살게 하려는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다. 망각 상태의 시민으로 축소된 것이다."



곱씹고 또 곱씹어 봤다. 무엇이 이렇게 다급한 마음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 이건 남 걱정이나 세상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이다. 개인의 일상은 점점 더 벗어날 수 없는 프레임 안에 갇혀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나 혼자 외딴섬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빨라진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달리다 보면,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른 채 길을 잃어버릴 때가 종종 있다. 타인의 꾸며진 삶에 닿으려고 애쓰다 보면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아채게 된다. sns에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요즘의 방식은 모순적이게도 박탈감을 동시에 선사하기도 한다.


나는 나를 표현하고 알리려고 애쓰는 한편, 그 안에서 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그저 흐름에만 맡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라고 치부해버려도 될까.


그렇게 회피하고 눈 감아도 되는 걸까. 내가 가지고 누리고 있기에 무감각한 것들에 대해 공감을 이야기해도 될까. 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있을까. 내가 상처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았다고 자신할 있을까. 


어떤 미친놈이 세상을 혼란에 빠트렸다고 말하면, 이 세상이 미치지 않은 게 되는 걸까.


조커보다 더 섬뜩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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