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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Oct 18. 2019

여행에서 버려야 할 마음가짐



예전엔 여행을 어떻게 다녔더라.


특별한 취향이나 기준도 없었고 찾아볼 만한 정보도 없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해외여행을 갈 땐 온갖 잡다한 정보로 가득한 두꺼운 책 한 권을 사서 비행기에서 공부하듯 열심히 읽었다. 모르는 길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고 한 번쯤은 길을 헤매는 게 당연했다.


중국 북경에서 교환학생을 보내던 때의 여행이 생각난다. 친구와 함께 pc방에 가서 블로그의 정보들을 수집했고 mp3에 노래를 다운로드해서 여행용 bgm을 두둑이 준비했다. 생각과는 다른 숙소 컨디션에 실망하기도 했고 금액을 더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황당해하기도 했다. 남쪽 도시인 계림에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올 때 침대칸 좌석표를 구하지 못해 27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던 기차여행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젠 그럴 일이 없다. 호텔의 리뷰는 너무나도 자세하게 나열되  어 있고 내비게이션과 지도 어플엔 별표로 미리 찍어둔 핫플레이스가 넘쳐난다. 산속에 홀로 자리 잡은 카페도 얼마든지 쉽게 찾아갈 수 있고 식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미리 메뉴를 훤히 꿰고 있다.


편안하고 너무도 안락했던 얼마 전 여행길의 어느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일출을 감상하느라 잠에서 일찍 깨어나 이것저것 생각하다 문득 떠올렸다. 요즘의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행을 즐기고 있을까. 나는 무엇을 자꾸만 버리려 하는 걸까.










시간의 조급함



여행의 효율은 올라갔는데도 마음은 자꾸만 조급해진다. 특히 여행을 떠나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할 때부터 조급함은 시작된다. 미리 찾아놓은 맛집이나 명소는 괜찮은 곳일지, 시간 안에 다 둘러볼 수 있을지 가늠해보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다음 장소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찾아보기 시작한다. 주변을 둘러보기보다는 스마트폰 안에 지도를 탐색하는 데 집중한다. 여행의 도착을 알리는 인증샷을 올리기도 한다.


어느새 경험의 개수가 인증샷의 개수가 되었고 그게 곧 여행의 성과를 말해주는 지표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게 곧 만족감으로 연결되기도 하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가끔은 헷갈린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검사받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래서 천천히 걷는 산책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하늘도 한 번 바라보고 땅 밟는 소리도 느껴보며 조급한 마음을 덜어낼 수 있는 시간. 별 것 아닌 것들에 목을 메지 않고 가볍게 털어버릴 수 있는 시간들. 어쩌면 조급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 더 애써야 하는 일들인지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체화된 급한 마음의 습관들.










핫플에 대한 집착



알면서도 놓아버리지 못하는 마약 같은 그것. 은 바로 핫플레이스 찾아가기. 핫플만 찾아가리라고 다짐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평소 트렌드 관련 일을 하면서 생겨난 습관적 집착은 일상이나 여행지에서도 이어진다. 방송에 여러 번 나온 맛집, 사진 찍기 좋은 카페, 새로 생긴 가게들. 얼마 전 인스타에서 보고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공간들은 어김없이 여행의 목적지가 되곤 한다.


비주얼 좋은 맛집은 가끔 실망스러운 맛을 안겨주기도 하고 핫한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탓에 안 좋은 기억을 남기기도 하지만, 새로운 경험을 안겨다 주고 예상치 못한 영감을 발견하는 곳이기도 하기에 핫플로 떠나는 여행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그야말로 기대와 실망, 감탄과 아쉬움이 뒤섞인다.


여행이라고 해서 푸짐하고 그럴싸한 음식을 먹으러 갔다가 속이 더부룩한 채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했다. 매 끼니를 반드시 챙겨 먹어야 한다고 누가 시켰지? 아무도 강요한 사람은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내 안의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어쩌면 이렇게도 둔하고 무심할 수 있을까. 


여행은 좀 더 나를 들여다봐야 하는 여정임에도 말이다. 










계획에 대한 계획



원래 계획 세우는 걸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뜻밖의 장소에서 갈만한 곳을 찾아야 할 땐 멘붕이 오기도 한다. 그래서 미리 곳을 정해놓고 지도에 즐겨찾기를 넉넉히 해두면 보험을 여러 개 사람처럼 안심이 된다. 그렇게 플랜 b와 플랜 c를 두둑이 챙겨놓는 습관이 만들어졌다. 


하루에 무리가 될 정도로 꽉 찬 계획을 세우던 때도 있었다. 매일 도시를 옮겨 이동한다거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녀야 할 곳을 다여섯개씩 정해놓는다거나. 하지만, 여행엔 아무리 미리 계획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일어난다. 늦잠을 잔다거나 혹은 열차가 연착되거나. 그렇게 될 경우 나머지 계획들은 더 초조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게 된다.


몇 번의 스파르타식 여행을 거친 후엔 여행에 대한 마음가짐을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루에 두세 군데 이상의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정한 것이다. 일부러 조금은 아쉬움을 남기는 계획을 잡는 것인데, 그렇게 여행을 해야 그 시간을 좀 더 잘 보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우연한 기회나 만남에도 고개를 돌려볼 수 있는 여유가 그제야 생긴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생겨버린 조급함, 핫플에 대한 집착, 끝없는 계획 세우기. 전부 다 일상의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단어가 아닐까. 그게 시간이 한정되고 변수가 많은 여행이라는 상황에서 조금 더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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