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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Oct 15. 2019

나만의 알코브, 빨간 좌석버스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좋아한다. 어딜 가나 막히는 수도권에 살면서 버스를 온전히 좋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막히는 도로 위에서 이동시간 두 배는 기본이고 급출발과 급정차에 온몸이 휩쓸리기 일쑤다.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타는 바람에 약속 시간에 늦어 발을 동동거리며 창밖을 바라봤던 기억도 꽤 여러 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좋아한다. 내 앞과 옆이 모두 트인 지하철보다는 온전히 나 혼자 앉아서 멍을 때리거나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버스 역시 폐쇄된 공간은 아니지만, 자리에 앉으면 나만의 공간감이 생기는 것 같다.











특히, 크고 빨간 좌석버스를 좋아한다.



좌석버스는 대부분 도시의 경계를 넘어가기 때문에 일반 시내버스에 비해 이동거리가 긴 편이다. 좌석도 더 많고 등받이는 높으며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차의 흔들림도 어쩐지 시내버스보다 덜 한 느낌이 든다. 한 번 타면 한 시간은 기본이기에 승객들은 분주한 움직임 없이 잠을 청하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응시한다. 붐비는 출퇴근 시간만 피하면 옆자리까지 내 차지가 되어 짐을 놓거나 편안한 자세로 집까지 갈 수 있다. 


누구에게나 선호하는 자리가 있는 법인데, 나의 최애 자리는 오른쪽 뒤편 버스의 뒷바퀴 위다. 턱이 올라와있어 다리가 조금 더 편하기도 하고 뭔가 구석진 느낌이 있어서 항상 그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한 동안은 창밖을 응시한다. 지나가는 풍경도 바라보고 버스 타기 전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보기도 하고 집에 가서 할 일을 세어보기도 한다. 한마디로 온갖 잡다한 생각들을 펼쳐내는 것인데, 어찌 보면 나만의 방에 들어가는 준비의 과정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 자리에 익숙해지면 책을 펼쳐 든다. 좌석버스를 타는 날엔 무조건 책을 들고 나온다.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공간이자 시간이기에. 없던 집중력도 생기고 조급했던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니, 최고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따금 인상적인 문구가 있는 페이지는 스마트폰으로 찍어두기도 하고 작은 노트를 꺼내 메모를 하기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그 내용과 상관없는 아이디어들이 툭툭 생각날 때도 있다. 소설을 읽다가 내 글의 글감을 건져 올린 적도 여러 번이다. 길고 긴 이동시간이 싫지만은 않은 이유는 충분하다.









오래된 기억



서울에 사는 동안은 좌석버스에 대한 기억을 잊고 지냈다. 딱히 탈 일도 없었다. 다시 경기도민이 되고 나니 오래전 좌석버스를 처음 타고 다니기 시작했던 때가 생각났다. 스무 살 때 나는 두 시간이 넘는 거리의 학교를 다니느라 버스 종점에서 종점까지 이동한 후에도 한참이나 지하철을 타야만 했다. 그땐 이 좌석버스라는 것이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고되고 힘든 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공간인 것처럼 느껴졌다. 털썩 앉고 나면 '결국 이걸 또 탔구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 어서 빨리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전 종종 들리는 곳이 있었으니 맥도날드. 워낙 긴 이동시간 탓에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배가 고파지는 날이 많았다. 어느 날은 햄버거 세트를 포장해서 버스를 탔다. 콜라와 후렌치 프라이를 먹으면서 가는데, 그게 그렇게 꿀맛 같았다. 차 안에 냄새가 퍼질까 싶어 창문을 살짝 열어놓기도 하고 눈치를 보며 하나씩 집어먹기도 했다. 버스에 사람이 많은 날엔 콜라만 마셨고 없는 날엔 햄버거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한 손에 종이봉투를 쥔 채로 꺼내먹느라 눅눅해진 감자튀김이 그때는 왜 그렇게 맛있었을까.


낯설고 복잡한 세상에 적응하느라 바빴던 어린 시절 나의 고된 좌석버스에서의 시간을 위로해 준 건 맥도날드 불고기버거 세트가 유일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어릴 적 타던 좌석버스나 지금 타는 좌석버스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걸 대하는 나는 많이 달라졌다. 일단 나이를 먹었고 지지고 볶았던 시절을 지나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와 안정이 생겼다. 가끔은 너무 늘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밋밋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더 빨간 좌석버스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가 되었고 적당한 긴장과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균형의 공간이 되었다. 모처럼 서울을 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마음껏 풀어질 수 있는 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기도 하다. 이제야 이 공간을 나만의 '정신의 방'으로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진정한 알코브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알코브 

; 방 한쪽에 설치한 오목한 장소. 침실, 서재, 서고 등 반독립적 소공간으로 사용한다.


건축이나 인테리어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인데, 내가 생각하는 알코브는 독서를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좋은 '공간 안에 또 다른 공간'이다.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은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 방구석 어딘가에 우산을 펼쳐서 그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을 거다. 그때부터 자기만의 알코브 만들기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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