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적 Nov 27. 2019

스타벅스에 대한 기억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서 1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스타벅스로 향했다. 


약속이 있는 날처럼 꾸미진 않았지만 동네에 혼자 외출한 것 치고는 단정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걷는 것도 좋았고 길가에 떨어진 낙엽을 바라보는 것도 스타벅스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분을 은근히 붕 뜨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 시간 동안 이 미국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드나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거리에서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이용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를 참 잘 유지하면서 변함없는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곳. 어느 장소에 위치한 어떤 매장을 가도 그 적절함의 평균이 가장 잘 유지되는 브랜드. 그곳이 바로 스타벅스다.


처음 스타벅스를 방문했던 건 수능이 끝나고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로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어쩌다 가게 되었는지, 알고 갔는지 모르고 갔는지 조차 헷갈릴 정도로 기억이 희미하다. 내가 놀던 거리에 스타벅스가 있었을 뿐이었고 그때의 나는 매일 같이 외출해 친구들을 만나며 머무를 공간을 찾아다녔다. 2층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친구와 수다를 떨던 장면이 생각난다. 고3의 해방감을 만끽하던 시기에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장소들 중 하나였던 거겠지.


대학을 다니면서는 잠시 잊었다. 학교 앞 거리는 그때에 유행하던 것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는데, 아주 작은 프랜차이즈나 푹신한 소파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들로 채워진 카페들이 많았다. 파르페와 빙수, 로즈버드와 민들레 영토, 캔모아 등등. 이젠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이 되어버린 그때만의 것들이다. 그때의 카페는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이지, 혼자의 시간을 즐기는 곳으로 여겨지던 공간은 아니었다. 


취업을 하고 정신없던 사회 초년생 시절에 다시 스타벅스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회사 근처에는 항상 스타벅스가 있었고 그곳은 출근 전 혹은 퇴근 후의 근심을 달래주는 곳이었다. 주로 테이크아웃으로 한 잔 받아서 걸어가며 마시는 시간이 일상의 틈 안에 유일한 힐링이었던 기억이다. 회사에 중요한 손님이 오면 꼭 스타벅스나 커피빈의 커피를 사 오라고 해서 심부름을 하러 가던 곳이기도 했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에 커피 향을 맡으며 잠시 숨통을 트기도 했다.


사회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본격적인 야근의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야근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모자란 주말 근무와 밤샘 업무에 시달리며 잔뜩 절여졌던 그때. 돈은 버는데 제대로 쓸 시간이 나지 않았고, 과도하게 더 일한다고 해서 더 버는 것은 아니었던 그때. 끼니때마다 스타벅스를 찾았다. 출근하면서 한 잔, 점심에 한 잔, 저녁에 한 잔. 밥보다 비싼 커피값이 익숙지 않았던 사람들은 '된장녀'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지만,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회사 생활에서 유일한 게 돈을 쓰고 마음을 내려놓는 해방구 같은 곳이 내겐 스타벅스였다. 이것저것 샷 추가도 해보고 시럽도 덜어내 가며 내게 맞는 메뉴를 찾는 재미에 빠지기도 했고, 원두나 굿즈를 구경하고 몇 개 사보기도 하며 그곳을 놀이터 삼았다. 


그렇게 브랜드의 제대로 된 충성고객이 되어갈 때쯤 '온워드(Onward)'라는 책이 나왔다.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자리와 모든 매장의 카운터 앞자리를 차지했던 그 책은 스타벅스의 ceo였던 하워드 슐츠가 쓴 책으로 아직도 내 책장에 꽂혀있다. 이때부터 나는 스타벅스를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전략을 공감하며 우러러보기도 했다. 여러 컨설팅의 과정에서도 성공사례로 자주 써먹으며 '잘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파하고 다녔다.


프리랜서가 된 이후로 스타벅스는 본격적으로 내게 '일하는 장소'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회의 전 숨을 고르며 노트를 정리하고 미팅을 하고 노트북을 들고나가 일을 하기도 하는 공간. 어떤 클라이언트가 "심리적으로 가장 편안하다고 느끼는 장소는 어디인가요?"라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스타벅스요."라고 답을 했었다. 집도 다른 곳도 아니었던 그곳이었던 이유는 정신적으로 온전히 혼자가 되어 타인들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곳에서의 시간은 적당히 나를 편안하게 해 주면서 동시에 적당히 깨어있게 해 준다.


스타벅스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다른 카페에 가면 불편함을 느낄 때도 종종 있다. 콘센트가 없다거나 매장 직원이 불친절하고 눈치를 보게 만든다거나 디카페인이 없다거나 할 땐 자연스럽게 시무룩해진다. 스타벅스의 환경과 서비스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도 있겠지.


한 동안은 개인의 취향과 감성으로 꾸민 공간을 찾아다니는 재미에 빠져 스타벅스를 멀리했다. 지겨울 때도 되긴 했지. 그러다 다시 이곳을 찾게 된 건 임신을 하고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후 부터다. 생각보다 디카페인을 제공하는 카페가 많지 않고 이동하면서 가는 곳마다 디카페인을 판매하는 곳을 일일이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자연스레 다시 스타벅스에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가끔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과 시끌벅적한 소리와 후덥지근한 공기가 인상을 찌푸리게 할 때도 있고, 쓰디쓴 아메리카노 맛이 영 탐탁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발을 끊는 건 쉽지 않다. 일상적인 카페 공간에 기대하는 바가 내가 느끼는 최고의 만족점을 모아놓은 집합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최고의 커피맛,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 연출과 음료 비주얼을 감수할 만큼 멀리 떨어진 불편한 카페를 찾아다니는 즐거움과 스타벅스를 다니는 목적은 결코 교차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올해 연말도 일찌감치 울려 퍼지는 재즈 캐럴을 들으며 e-프리퀀시를 모아 받게 될 굿즈를 기대하며 이곳에 앉아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지극히 일상적인 날에 나의 할 일들을 정리하고 감정의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시간들.






매거진의 이전글 넌 왜 그렇게 김치볶음밥을 좋아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