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에는 비가 반갑지 않았다. 책가방에 신발주머니, 보조가방까지 준비물이 가득한 날에 비라도 내리면 그게 그렇게 귀찮고 성가실 수가 없었다. 무거운 우산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 되었고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우산 속에서 몸을 웅크리는 것도 괴로웠다. 하루 종일 축축하고 찝찝함에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날이었다. 거기에 왠지 모르게 꿀꿀해지는 기분까지 더해져 비를 싫어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성되었다.
대학생 때 딱 한 번 친구와 함께 일부러 비를 맞아본 적이 있다. 기숙사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순간 왠지 모르게 나가고 싶어 졌다. 우리 나가서 비 맞아볼래. 친구는 흔쾌히 좋다고 했고 우리는 즐겁게 비를 맞았다. 비를 맞는다는 건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고 지금 안 해보면 다신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 느낌이 맞았다. 다시는 비 맞으러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비를 종종 맞기는 했다. 워낙에 일기예보 확인하는 걸 귀찮아하는 타입이었고 우산의 무게가 짐스러웠기 때문. 어쩔 수 없이 우산을 챙긴 날엔 가방이 세상 무겁게 느껴지곤 했다. 약간의 비는 맞고 말지. 말리면 되지. 그렇게 준비성 없이 다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편의점 우산을 참 많이도 샀다. 제일 돈 아까운 게 편의점 우산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산을 사면 곧 비가 그쳤다. 그 많던 우산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를 일이다.
누가 비를 몰고 다니나. 그게 나인가.라고 생각한 적도 꽤 있다.
인생의 결정적인 날에는 항상 비가 내렸다. 결혼식을 치르던 날에 비가 내렸고 4년을 살았던 첫 신혼집을 떠나던 날에도 비가 내렸다. 왜 하필 이런 날 비가 내리냐고 생각했다. 하객들이 비 맞으면서 내 결혼식에 오려면 꽤나 귀찮겠다 싶었고, 이삿날에는 짐들이 비에 젖을까 걱정했다. 이런 날 비가 오면 잘 사는 거라는데. 도대체 얼마나 잘 살려고 매번 비가 내리나.
우연일지 몰라도 잘 살고 있다.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자랑거리가 많은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라고 답하겠지만, 편안하게 물 흐르듯 살고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남편과 나, 이젠 아이까지 우리 셋은 크고 작은 불안 속에서도 나름의 의기투합으로 삶을 잘 꾸려내고 있다.
아이를 낳고서부터는 공기에 민감해졌다. 미세먼지 어플을 설치하고 매일 확인하며 외출 계획을 세웠다. 슬프게도 공기가 안 좋은 날이 많아서 자주 나가지 못했다. 나쁨, 아주 나쁨, 외출하지 마세요까지. 괜히 다운로드하였나 싶을 정도로 미세먼지는 일상의 방해꾼이 되었다.
그러다 가끔씩 맑은 공기를 마시라고 기분 좋은 알림이 오는 날도 있는데 그건 바로 비가 오는 날이나 그다음 날이다. 비가 내리고 나면 먼지가 땅에 싹 가라앉아 상쾌하고 깨끗한 공기가 코로 들어온다.시야도 맑아진다. 어제 비가 와서 오늘은 공기가 좋았다. 비 온 뒤만을 기다렸던 나는 서둘러 유모차를 끌고 나가 온 동네를 휘젓고 돌아다녔다. 그래도 마스크는 벗을 수 없다는 게 애석하지만 이것도 감지덕지지.
어느새 나는 비를 기다리고 반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