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에는 의미가 없다. 의미부여는 있어도. 색은 그냥 색이다. 색은 그저 '빛의 파장에 대한 눈의 반응'일뿐이다. 색은 의미가 없지만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중 가장 강하고 빠르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많은 의미부여들이 생겨난다. 누군가에게 파랑은 하늘이나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설렘 일지 모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우울함이 되기도 한다.
밝은 색을 좋아한다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채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저 평범 무난한 성격을 지녔을까. 분홍색을 좋아한다면 여성일 확률이 높을까. 파란색은 남자색일까.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열정적일까. 알록달록한 색은 어린아이들만 좋아하는 걸까. 검은색은 권위를 지녔을까. 좋아하는 색이 바뀐다는 것은 성향이나 취향의 변화를 의미하는 걸까.
어떤 색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건 어딘가 좀 기이한 것 같다.
색에 관한 첫 기억은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한창 안에 하얀 털이 몽글몽글하게 말려있는 긴 점퍼가 유행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같은 반 친구들이 하나둘 그 점퍼를 입기 시작했고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났다. 과반수 이상의 아이들이 점퍼를 입는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옷을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모자가 달리고 안에 하얀 털이 있는 긴 점퍼야."
나는 그 점퍼의 디자인을 엄마한테 열심히 설명했고 엄마는 결국 내 성화에 못 이겨 새 옷을 사다 주셨다. 드디어 내게도 유행 아이템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옷을 꺼냈는데.. 아니 이 새파란 색은 뭐지.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엄마 나한테 왜 그래. 그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아직도 그 순간의 감정을 기억한다.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아니 실망이란 말로는 부족했다. 이건 10년을 살면서 겪었던 좌절 중 가장 큰 좌절이었다. 게다가 번쩍이는 광택감은 또 뭐람.
'내가 이걸 입어야 해? 아니 왜 이런 걸.. 이건 남자 색이잖아. 내 친구들은 다 노랑, 핑크, 빨강 같은 예쁜 색만 입고 다닌다고. 이걸 창피해서 어떻게 입어.'
나의 생각은 이러했는데, 그때 내가 엄마한테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운 감정이라 기억이 지워졌나.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점퍼를 입고 다녔던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파란 점퍼는 내 마음속에 오랜 기간 응어리로 남아있었다. 엄마를 향한 약간의 원망과 함께.
엄마는 남색을 좋아했다. 그 색을 '곤색'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른다. 엄마의 옷장을 열면 열에 아홉이 곤색이다. 엄마가 새 옷을 샀다고 보여주면 원래 있던 거 아닌가 싶은 것들이 많다. 엄마의 곤색 취향이 하나밖에 없는 어린 딸에게 시퍼런 옷을 사주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뒤끝이 긴 나는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가끔 꺼내는데 엄마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무심한 반응이다.
파란색은 내게 안 좋은 기억만 남겼지만 어른이 되고서 나는 데님과 청색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남색에 가까웠지만 남색은 아니었다. 파랑과 보라 사이의 약간 톤이 다운된 차분한 색상을 보면 예쁘다고 느꼈다. 거리를 지나가다 비슷한 색이 발견되면 "와 진짜 예쁘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남편은 한 때 나를 '코발트블루'라고 불렀다. 코발트블루에만 반응한다는 뜻이었다.
왜 여자 아이들은 핑크색을 좋아하고 남자아이들은 파란색 옷을 많이 입을까. 어떻게 이렇게 성별에 따라 색이 획일적으로 나뉘어있을 수 있을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은 모두 제각각 개성이 넘치는 존재인데 말이다. 이런 고정관념에 대한 반항심이 마구마구 피어올랐던 나는 딸을 낳으면 절대로 핑크를 입히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아들을 낳았다. 그래, 그렇다면 난 파랑을 입히지 않겠어. 남자는 핑크지.
하지만 핑크는 내가 선호하는 색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라색은 어떨까. 어느 날 갑자기 연보라색이 너무 예뻐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그 어떤 것에도 편향적이지 않고 남녀를 가르는 고정관념이 없으며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가 느껴져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원색의 빨강, 노랑, 파랑처럼 인테리어를 해치지도 않고 사진을 찍어도 그저 예쁘게 나오는 보라색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보라색을 좋아했고 우리 아기에게도 보라색 옷을 자주 입혔다.
이제 곧 생후 9개월. 팔도 다리도 쑥쑥 커져서 벌써 안 맞는 옷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마침 곧 출산 예정인 사촌 둘이 있어 옷을 물려주기 위해 집으로 초대를 했다. 한 명은 딸이고 한 명은 아들이라고 했다. 나는 미리 옷을 나누어 담아두었다. 파란색은 아들에게, 핑크색은 딸에게. 핑크색 옷은 장식이 많아 누가 봐도 딸이 입어야 할 것 같았다. 물려받았지만 별로 입히지 않은 옷들이었다.
옷을 받은 사촌 동생이 해맑게 말했다.
"색깔 차이가 선명하네."
그러네.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걸 생각해서 담은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었네. 사촌동생이 스치듯 했던 그 말이 은근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왜 그랬지.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색을 처음 본 여섯 살짜리 꼬마 아이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색맹이었던 아이에게 엄마는 색맹 교정 선글라스를 선물했고 아이는 그렇게 난생처음 색이 가득한 세상과 마주했다. 아이는 마치 황홀경을 본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방방 뛰고 소리를 지르며 주변의 색들을 마구 가리켰다. 하얀색, 노란색,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그리고 엄마의 얼굴은 복숭아색. 평범한 사람들에겐 당연한 색의 세상이 그 아이에겐 너무나도 놀랍고 기쁘고 흥분되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아이가 처음 보았던 색은 자신의 가방색인 빨강이었는데, 그 첫 강렬함 때문이었는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되었다고 한다. 흑백이 전부인 세상을 살다가 처음 본 색은 얼마나 놀랍고도 감탄스러웠을까. 꼬마 아이의 빨강이 이토록 순수해 보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감정과 기억으로만 선택한 색이라는 점이다.
어떤 색을 선택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때로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들이 개인의 순수한 선택을 가려버리곤 한다. 나만 다른 색을 선택하는 것은 어딘가 좀 튀는 행동 같고 세련되지 못한 것 같고 성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편견에 대한 반항심으로 또 다른 편견을 선택한 나처럼..
우리 아이는 그저 다양한 색을 경험해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자유롭게 선택했으면 좋겠다.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색에 즐겁고 통통 튀는 의미부여를 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엄마가 너에게 편견없는 '색 친구'가 되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