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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Oct 08. 2020

당 충전 같은 소비


어떻게 해도 꿀꿀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남편과 동네 상가 주변을 걸어 다니다가 빈 손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실래?"

"아니야. 됐어."



카페에  비교적 자주 가는 편인 나이지만 그래도 매번의 커피값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한 잔 마시자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참자 싶은 절제의 날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절제에도 에너지는 소비되고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기분 전환이 안되지?"

"돈을 못써서 그래."



남편은 종종 무심한 듯 팩트를 날리는 사람.


커피를 마시던 물건은 사든 간에 돈을 쓰는 행위가 주는 환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렇게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게 신기하다. 카페의 커피가 집에서 마시는 맛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더라도 공간이 주는 맛은 맛 그 이상의 맛이다. 어쩌면 내가 원했던 건 커피가 아니라 좋은 분위기의 공간에서 돈을 쓰고 앉아있는 그 잠깐의 행위가 아니었을까.


만원도 안 되는 이 잠깐의 소비는 유통기간이 매우 짧다. 그래서 내일이 되면 또다시 한 잔을 마시러 카페에 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들어간 김에 좋아하지도 않는 케익 한 번 훑어보고 집에도 여러 개 있는 텀블러 진열대를 서성거려 본다. 그러다 뭐라도 하나 사는 날이면 엔돌핀 급상승으로 인해 함박웃음 짓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카페를 들락거린다.


생각해보면 모든 소비가 이런 식인 것 같다. 사는 순간의 기쁨이 쓰고 간직하고 기억하는 기쁨보다 커져버렸다. 핫딜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루 종일 여기저기 검색하다 구매 버튼을 누르고 나면 해냈다는 성취감과 뿌듯한 안도감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 증발한다. 그리고 이삼일 뒤 집 앞에 택배가 도착하는데 기쁨보단 귀찮음이 앞서 하루 이틀은 현관에 그대로 놓아둔다.



내가 뭘 샀더라.

이 물건이 꼭 필요했었나.

생각보다 작네, 적네, 별로네, 나쁘지 않네.

실은, 없어도 상관없을 거 같아.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손해 보는 것 같은 다급함에 구매하지만 막상 물건을 손에 쥐고 나면 마음은 차갑게 식어버리기 일쑤다. 가성비의 시대다. 싸고 좋은 물건들은 넘쳐나고 그것들을 구매 버튼 하나면 얼마든지 대량으로 소유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물건만 많은 것이 아니다. 물건을 파는 플랫폼들 역시 하도 많아서 종종 선택지에 함몰되곤 한다. 너무 많은 회원가입이 나와 내 개인정보를 괴롭힌다. 소비는 한순간에 즐거움에서 스트레스로 변질된다. 닭이 먼저였나 달걀이 먼저였나.


SPA 브랜드라는 개념은 패션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모든 카테고리의 상품이 SPA화 된 것 같다. 유행은 실시간으로 변하고 사람들의 소유욕도 더 잦아졌다. 더 많은 것을 더 자주 새 것으로 교체하게 된 것이다. 잠깐 쓰고 버리는 테이크아웃 잔처럼. 옷도, 커튼도, 스마트폰도, 세탁기도, 차도, 집도. 습관이 무서운 건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거다. 스마트폰은 1-2년 쓰다 보면 슬슬 교체하고 싶어 지고, 오래된 스마트폰은 어쩐지 옛날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트의 시식코너가 생각난다. 사지 않을 거지만 공짜로 맛보는 게 좋아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곳. 특히 정육 코너에 소고기라도 등장하면 사람들은 줄을 선다. 나도 몇 번 받아먹었다. 왜 시식은 더 맛있는 걸까. 뭔가 이득 본 기분을 잠시 만끽한다. 거리에서 나눠주는 물티슈처럼 없어도 괜찮지만 있으면 좋은 거다. 새로 문을 연 가게들을 홍보하기 위해 나눠주는 전단지는 받자마자 쓰레기가 되어버리지만 물티슈는 받아서 가방 속에 넣어두고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 날을 기다린다. 그러다 쓰면 좋지만 물티슈의 수분이 말라 버리게 되어도 손해 볼 거 없다. 버리는 데 돈 드는 거 아니니까.


어제는 길을 걸어가다 미용실 전단지를 얼떨결에 받고 말았다. 나눠주시는 분의 노고를 생각해서 받을 때도 있고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이 손을 내밀어 받기도 하는데 이번엔 후자였다. 아 내가 왜 받았지. 그렇게 며칠 동안 집안 구석을 굴러다니다 아무런 홍보 효과를 누리지 못한 채 쓰레기장으로 가야 하는 전단지의 슬픈 운명이란.


요즘은 돈 쓰는 것이 주는 즐거움이나 과시, 용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 버리는 것에도 돈이 든다면, 플라스틱을 모으는 것이 돈이 된다면, 쓰레기를 많이 배출하는 제품은 세금이 부과돼서 더 비싼 값을 주어야 한다면 우리의 소비 습관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까. 좋은 물건을 오래 쓰는 것이 더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인식이 생긴다면 어떨까.


육아에 지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젤리나 초콜릿, 깡 종류의 과자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편이다. 어떤 보상 심리가 나를 단 맛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먹고 나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입 안이 텁텁하고 건강 걱정, 살찔 걱정에 기분이 안 좋아진다. 나 왜 먹었지, 기분 찝찝하네, 앞으로는 먹지 말자.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또 단짠에 중독되어 마트 과자 코너 앞을 서성거린다. 매일이 도돌이표다.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이미 뜯은 과자 봉지 앞에 절제는 무의미하다. 애초에 뜯지 말았어야 했다.


당 충전의 유통 기한이 그리 길지 않고 건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순간의 쾌락이 긴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도.


더 큰 허기짐을 느끼게 될 거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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