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진다는 건 애초에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일 테니. 그것이 물건이든, 현상이든 혹은 감정이든 간에 누군가의 어딘가에는 반드시 남는다. 그렇게 믿는다. 상처가 지워지는 게 아니라 아무는 것처럼.
아기에게는 태어나 첫 3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들 한다. 앉고 일어서고 걷는 신체의 발달과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의 발달, 언어, 인지, 정서 등이 모두 이 시기에 급격하게 이루어진다. 부모와의 애착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한데, 안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먹고, 자고, 싸는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방식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인간은 어른이 되어 인생의 첫 3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모든 경험은 흔적처럼 내면에 남아 그 사람의 빛깔을 드러내는 셈이다.
모든 경험은, 생각은, 도전은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눈으로 드러나는 어떤 결괏값이 아니더라도 잔여물처럼 남아 어딘가에는 영향을 주고 그다음을 걸어가게도 하며 누군가에게 옮겨지기도 한다. 내가 아이를 낳은 것이 생각지도 못하게 환경에 관심을 갖게 만든 것처럼. 1년 전 기록했던 '쓰레기 일기'가 다시 나를 움직이게 한 것처럼.
시민단체인 '서울환경연합'에서 운영하는 '플라스틱 방앗간'이라는 곳이 있다. 쌀을 가져가면 떡을 만들어주던 옛 방앗간처럼 분리수거함에 버려도 재활용되지 않는 작은 플라스틱을 모아서 보내면 치약 짜개로 만들어 보내주는 업사이클링(upcycling) 프로젝트다. 아무나 다 보낼 수는 없고 한정된 인원을 모집하면 선착순 마감으로 진행되는데, 이들을 참새클럽이라 부른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라는 속담이 떠올리게 하는 센스 있는 이름이다.
얼마 전 이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고 내년 3월에 시작되는 시즌3에 신청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후 작은 플라스틱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무와 같은 타소재가 부착되어 있지 않은 PP 혹은 HDPE 소재로 된 것을 모아야 하는데, 주로 페트병 뚜껑이 이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의 페트병들은 대부분 이 소재로 되어 있고 혹시나 잘 모르면 페트병에 쓰여있는 재활용 마크들을 확인해보면 된다.
아직 가입도 하지 않은 이 클럽에 대비하는 나의 마음가짐과 습관은 많은 것들을 바꾸고 있다. 주방 다용도실에 페트병 뚜껑 모으는 수납함을 비치해 두었고 물건을 쓸 때, 버릴 때 패키지에 쓰인 재활용 마크를 유심히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분리수거해 버리는 많은 쓰레기들 중 재활용되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깨닫게 되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분리수거장에 가게 되면 페트병 뚜껑을 몇 개씩 주워올 때도 있는데, 어느 날 나의 이런 행동을 지켜보던 남편이 내게 물었다.
"남이 버린 것 까지 주워오는 이유가 뭐야?"
자초지종을 듣지 못한 남편의 지극히 순수한 물음이었다. 유난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웠던 나는 열변을 토하며 스토리를 설명해주었고 남편은 자기도 종종 모아 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는 환경에 관련된 책과 다큐멘터리를 접하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실천하고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sns 계정을 개설했다. 알리고 공유하고 공감하기 위해. 아니, 말하기 위해. 텀블러를 들고 카페에 간 나의 하루와 내가 주워온 페트병 뚜껑과 잘 쓰고 있는 친환경 제품, 내가 버린 쓰레기 등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름도 '흔적'이라고 정했다. 내가 남긴 탄소 발자국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다 지은 이름이다.
연상 작용이 참 신기한 게, 한 동안 포기했던 채식 생활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식물을 키우고 싶어 졌다. 화훼단지에 가서 식물과 화분들을 사고 집 안에 초록의 공간을 만들었다. 싹이 난 당근이나 고구마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수경재배를 시작했다. 고구마의 무서운 생명력을 경험하고 있는데 자고 일어나면 쑥쑥 자라나 있다. 우리 아기와 고구마는 같은 방 옆자리에서 나란히 폭풍성장 중이다.
그렇게 도무지 틈이 나지 않는 나의 육아 일상에 틈을 벌려 새로운 에너지를 들이고 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이런저런 시도들은 내게 깨달음의 흔적을 남겼다. 대화의 흔적은 기쁨이고 기록의 흔적을 동력으로 남는다. 나의 시간들은, 행동은 순간이고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붙잡으려 오늘도 흔적을 남긴다.
흔적
; 어떤 연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