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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정화 식물'이라는 말의 기묘함

by 흔적



단어의 뜻이 무엇이건 쓰는 사람 마음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같은 단어도 다르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단어 하나로 '우리끼리만 아는'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게 바로 단어의 쓰임이 가진 묘미이자 굴레다. 그래서 종종 유튜브 댓글창의 재미에 빠졌다가도 눈살을 찌푸리는 논쟁과 혐오를 발견하면 영상을 넘겨버리곤 한다. 말장난이 말꼬리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그 단어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썼느냐는 알 수 없다. 받아들이는 사람 맘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대댓글이 오간다.


어릴 땐 많은 단어보다는 아는 단어들을 고르고 골라 썼던 것 같다. 일기장에 연필로 꾹꾹 눌러썼던 것처럼. 어른이 된 지금은 어떨까. 경험도, 아는 것도 더 많아진 지금의 나는 오히려 대충 있어 보이는 말들로 나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맥락만 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단어들을 남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든 건 어느 날 친숙했던 단어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들 그럴 때 있지 않나. 어느 날 어떤 단어가 매우 기묘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순간.


'공기 정화 식물'이란 단어가 내겐 그랬다. 식물은 원래 공기를 정화하는 생명체인데 구태여 식물의 이름 앞에 그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가 뭘까. 식물은 그 자체로 자연일 뿐인데 왜 그런 말을 쓰게 된 거지? 생각해보면 이건 매우 인간 중심적인 말이다. 인간에게 어떤 이로운 기능을 가졌는지에 대한 시선으로 만들어진 말.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자연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나 희소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정말 이상하다.


과거엔 도처에 자연이 있었을 거다. 집에는 마당이 있고 길가엔 수풀이 우거져있었겠지. 고개를 돌리면 쉽게 자연을 볼 수 있었던 때가 아마도 있었을 거다. 내 어릴 적 보다 훨씬 이전에. 물론 지금도 집 밖을 나가면 도로를 따라 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고 잔디도 있고 풀도 있고 꽃도 있다. 넓디넓은 아파트 타운의 극히 일부 공간에 답답하고 비좁게 다듬어져 있을 뿐.


집에 새로 들인 식물들의 사진을 찍고 sns에 업로드하며 '반려식물'이란 태그를 함께 달았다. 반려라는 단어는 '짝이 되는 동무'라는 뜻이다. 요즘은 애완동물이란 표현보다 반려동물이란 말을 더 보편적으로 쓴다. 동물을 소유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사는 가족의 존재로 존중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은 모두 '반려'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우리 아기에게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아침잠에 들 때면 식물들과 인사를 하는 거다. 아기 침대 근처에 화분을 놓아둔 탓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내가 손으로 식물들을 가리키면 물끄러미 쳐다보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글로리아 페페야 안녕. 고구마야 안녕. 오로라야 안녕. 행운목아 안녕."



'공기 정화'라는 말 보단 '반려'라는 말이 좋다.

너희 모두 오래오래 반려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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