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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Mar 20. 2022

리뷰 |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언젠가부터 의문이 들었다.

나의 미약한 제로웨이스트 실천이 기후위기에 어떤 자그마한 영향이라도 주기는 할까. 이게 다 소용이 있는 걸까. 나 역시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남편 말대로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풍요는 아닐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틀린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만, 내가 보고 듣는 것들이 tv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지 않아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할 뿐이었다. 체감하지 못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다 알면서도 낯설고 불편한 것을 모른척하는 것일 뿐이었다. 집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거나 핫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하고 있으면 기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세상이 무너져가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흔들릴 필요는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의문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나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환경 의식이 없는 사람들을 욕하며 분노에 휩싸여야 하는 것인지, 인류애를 가득 품고 선한 얼굴로 설득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변화를 이끌어낼 것인지.

물론, 희망을 주는 메시지들도 있었다. 그린 뉴딜이나 재생 에너지 같은 것들이 자본주의 안에서 기존의 성장을 대체하고 건강한 성장을 가능하게 할 것 같았다. 지구를 구원할 것만 같았다. 기존의 화석연료 자동차를 버리고 전기자동차를 구매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전기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 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버린다면 그 차체와 핸들과 엔진과 타이어는 다 어디로 갈까. 언제나 그랬듯 버리면 그만인 채로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쌓아두기만 하면 그걸로 탄소중립은 실현될 수 있을까. 뭐가 답일까. 거대한 풍력발전에 철새들이 치여 죽는다는데, 산을 깎아내고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다는데 이게 과연 더 괜찮은 게 맞는 걸까. 더 많이 생산하는 방식을 멈추지 않은 채 업사이클링 제품에 조금 더 관심을 갖는 정도로 충분할까. 지속 가능할까.

환경을 운운하며  많은 플라스틱을 쏟아내자는 방향으로 흐르는 생산과 소비 방식이 너무 이상했다. 믿음이 가지 않았다. 모든  그린워싱 같았다.​


"아무리 친환경이 중요해도 세상은  변해."

"뭔가를 만들어내야만 . 그래야 통해."

"사람들은 뭐라도 하나 손에 쥐여줘야만 해."

이런 말이 싫었다.  아는  확신에   태도가 불편했다. 포기인지 체념인지 모를 말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세상이 만들어진 후에 내가  세상에 나왔어도 세상은 계속 변하는 것인데  모든   틀에 맞춰야 하지. 더구나  틀이 잘못되었다는  지구가 온몸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자꾸 외면하는 것으로 편한 선택을 하려 하지. 그럴 거면 무엇 하러..

그러다  책을 만났다.​


sns에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빨간색의 강력한 색채로 외치고 있는 '지속 불가능'이란 단어가 마음에 콕 다가왔다. 자본주의는 지속 불가능하다. 아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왜 그런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었어. 어떤 부분이 어떻게 불편한지 명확하게 말하지 못했어. 그런데 누군가는 파헤쳐 본 거구나. 분석해낸 거구나. 답을 찾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제목에서부터 설득 당했다. 아니, 설득 당하고 싶었다. ​


책에 줄도 안 긋는 내가 이 책만큼은 하나하나 줄치며 읽었다. 책의 내용을 빠짐없이 외우고 누가 물어보면 술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길 바랐다. 모두가 저자의 주장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앞만 보고 향해 달려가는 것을 잠깐 멈추고 다른 방법도 있다는 걸 한 번쯤은 생각해 보길 바란다.

의심도  하고 옳다고 믿는 것들에 균열을  수만 있다면.

​​​



그럼 하나씩 이야기해 보자.

이 책의 저자인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남긴 '자본'을 토대로 자본주의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 마르크스 주의가 무엇인지 1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책에서 이야기하는 마르크스의 연구들이 소련이 실패한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안다. 초기의 마르크스가 주장하던 것들이 아니라, 그가 생전에 다 완성하지 못한 말년의 자료들을 토대로 한다. 자본주의의 마침표를 찍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르크스를 빌려왔을 뿐이다.

국가가 통제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시민이 직접 만들어나가는, 바꾸어나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책의 흐름대로 정리했으나, 목차에 따르지는 않았다.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나 개인적인 생각을 혼합하여 작성한 리뷰임을 밝힌다.

※ 참고만 할 뿐 정확한 내용은 책을 읽어보길 권함.

​​

1. 제국적 생활양식


우선 우리가 알아야  것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가 정당한 것이냐에 관한 것이다. 선진국에서 누리는 라이프스타일은 가난한 나라의 자원과 에너지를 수탈하고 노동력을 불공평하게 착취하며 유해한 쓰레기들을 외부에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생활방식이다. 책에서는 이것을 '어딘가  ' 사람과 자연환경에 부담을 전가하고  진정한 비용은 떼어먹는 '외부화 사회'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 세계 곳곳이 개발되고 자본주의가 손을 뻗치게 되면서 점점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더 이상 약탈할 나라가 없다. 지구는 과부하 상태다. 우리는 환경 오염을 줄이고 경제 성장을 이룬 유럽의 일부 나라들을 부러워하지만 환경적 책임을 다른 나라에 전가하고 이룬 깨끗한 도시를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많이 누리고 있다. 전 세계 상위 10% 부유층이 일상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중 절반의 책임이 있다고 한다. OECD 국가에 살고 있다면 상위 20% 정도는 된다고 봐야 하니 우리도 여기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

2. 그린 뉴딜도 답은 아니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친환경적인 성장이 기존의 성장을 대체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과학이, 기술이, 4차 산업혁명이, 신재생에너지가 인류를 기후위기로부터 구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회의적으로 이야기한다. 왜일까.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은 채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향을 고수하면서 이루어지는 친환경적인 전환은 결국 또 다른 자원 소비량을 늘리는 방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재생 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늘고 있지만 화석연료 소비량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재생에너지가 화석연료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늘어나는 소비량을 메꾸기 위해 추가적인 곳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전기차를 생산하기 위해 더 많은 희귀 광물을 채굴하는 접근법이 과연 진짜 친환경적인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친환경적인 전환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지금의 생활양식을 유지한 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 결국 또 자본주의의 또 다른 노예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 좋은 집, 좋은 차, 명품백, 해외여행을 당연하고 기본적인 전제로 둔 채 이루어지는 친환경은 불가능하다.

그린 뉴딜을 이야기할  논의되지 않는 ,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원 소비량을 줄이는 것이다. 성장을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성장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안에서 성장은  생존이기 때문에 애초에 본질이 다른다. 그러니 자본주의는 결코 기후위기로부터 우리를 구할  없다.


​​

3. 자본주의 안에서 탈성장?

기후위기는 빈부격차를 더 극심하게 만들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의 피해는 온전히 환경적 책임이 없는 자들에게 돌아간다. 지금까지 전 세계 10-20% 부유층이 누린 것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후난민이 되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상위 1%만이 지금과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럼 1%에 속하지 않는 우리에게도 기후위기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속 불가능한 이유는 자본주의의 본질 때문이다. 끊임없이 가치를 증식하고 자본 축적을 위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의 노동력과 자원을 이용한다. 이윤을 늘리기 위해서 아주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으며 자본이란 가치를 늘리기 위해 끝없이 달려간다. 옳고 그름도 따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확장과 성장, 개척만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안에서 성장을 멈추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탈성장은 경기 침체와 불평등, 빈곤 등 사회적 갈등을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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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커먼

저자가 마르크스의 개념을 가져와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커먼(common)'이다.

커먼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관리하는 부를 말한다. 하지만 이걸 국유화하는 방식은 사회주의로 가는 방향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방식도 답은 아니다. 커먼의 방식은 수도, 전력, 주택, 의료, 교육 등을 공공재로 만들어 시민들이 스스로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지속가능성은 사회적 평등과 밀접한 연결고리를 가진다. 부의 독점을 방지하고 구성원 사이에 갑을 관계를 없앤 순환적 경제만이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화폐와 사유재산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개인주의적인 생산이 협동적 부를 함께 관리하는 생산으로 대체된다. 책에서는 이 개념을 '코뮤니즘'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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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공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결핍을 낳는다. 인공적으로 희소성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결핍과 희소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과 피해가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두가 다 같이 풍요로운 건 자본주의의 습성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누군가의 생활을 더 가난하게 만들면서 성장해왔다. 모든 것이 대량 생산화되며 일부 기업이 산업을 독점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극심해진다.

화석 자본을 버리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애초에 자본주의가 풍부한 수력 대신 석탄과 석유를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독점이 가능한 에너지였기 때문이다. 희소한 에너지를 독점해 생산을 조직화하면 막대한 부를 얻고 노동자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가능해진다. 파괴와 낭비를 통해 기존에 풍요로웠던 것을 희소하게 만들면 여기서 소비가 일어나고 자본이 가치를 증식할 기회가 만들어진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기후위기도 새로운 경제적 기회가 될 수 있다. 물, 경작지, 주거지 같은 것들이 희소해지면 누군가는 이걸 이용해 막대한 이윤을 올리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진다.

자본주의 안에서 일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보면 더 풍요로운 것 같지만 실은 더 빈곤해지고 있다. 빚만 늘어나고 있다. 늘어난 빚을 위해 자본주의에 굴복하고 기업에 충성하는 노동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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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브랜드화

무한한 소비를 재촉하는 방법 중 하나가 브랜드화다.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브랜드의 가치를 필요 이상으로 동경하게 되었다. 로고나 브랜드 이미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본래의 가치보다 비싼 가격에 사게 만든다. 특정 브랜드 제품을 소유하고 경험하는 것이 타인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상대적 희소성을 만들어내는 차별화 전략은 끝없이 우리의 허기를 채워준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부러움과 허기짐을 끝없이 낳는다. 그래서 그다음, 그다음, 그다음이 있어도 또 그다음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충족되지 않는 희소성의 감각을 위해 노동에 내몰린다.'

라는 표현이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아무리 가져도 충족되지 않는 게 우리가 사는 사회의 습성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아버린 것이다. 아무리 가져도 모자란다고 느꼈던 원인을 찾은 듯했다. 그것에 너무 오랫동안 매달려 살아오며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하게 믿어왔던 브랜드에 대한 환상이 제대로 깨져버렸다.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안에서 소비를 억제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어렵다. 사람들이 자기 억제를 하지 않는 것이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의 기본 전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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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시민영화, 노동자 협동조합

자본주의도, 자본주의 안에서 탈성장도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답은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것뿐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념이라 우리는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확신했다. 자본주의를 벗어난다고 해서 삶의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순환이 끊어지는 게 아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공동체 사회인 커먼의 핵심 개념을 살펴보자.​


커먼은 시민들이 직접 생산 수단을 자율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 공동 관리하는 것이다. 민영화가 아니다. 시민영화다. 자본가와 주주 없이 노동자들이 공동 출자하여 생산 수단을 공동 소유하고 관리하는 조직이다. 커먼을 통해 사람들은 시장과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하고 생산할  있게 된다.

한 가지 예로 든 것이 시민전력회사와 에너지 협동조합을 설립해 재생에너지를 보급하는 방식이다. 소규모의 민주적인 관리로 비영리 전력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전기 생산을 로컬화하는 것이다.

노동자 협동조합의 또 다른 긍정적 효과는 노동의 변화다. 기계화, 분업화를 통해 생산성을 끊임없이 요구받는 지금의 노동은 우리를 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생산성을 높여 더 많은 돈을 버는 것뿐이다.

"우리는 충분히 생산하지 못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희소성의 자본주의의 본질이 있기에 가난한 것이다."


​​

8.대안

자본주의를 탈피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친환경 사회로 가기 위해 저자는 다섯 가지를 제안하는데, 그 핵심은 노동과 생산의 변혁이다.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안에서는 자연의 순환과 속도에 맞춘 생산이 불가능하다. 자연의 순환에 맞춰 생산이 이루어지도록 노동 환경 역시 대대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첫 번째, 사용가치 경제로의 전환이다. 상품 가치가 아닌 사용 가치에 목적을 두고 계획적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 가치란 브랜드화를 통해 매겨지는 경제적 가치가 아닌 실질적인 사용성의 가치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노동 시간의 단축이다. 불필요한 것을 만들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노동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마케팅, 광고, 투자 등 소비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산업은 축소하는 것이 답이다. 편의점도 24시간 운영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GDP가 보장해 주지 않는 삶의 질을 회복시켜야 한다.

세 번째 획일적인 분업화의 폐지다. 생산의 자동화와 매뉴얼화는 작업 효율을 극대화했지만 노동자의 노동을 더 단순하고 지루하게 만들었다. 개인의 자율성은 박탈되었고 노동자는 그저 기업의 부품이 되어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노동이 고통이 되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소비주의적인 활동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네 번째 생산 과정의 민주화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생산 과정에서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에너지와 연료, 기술 등 모든 과정을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일부 기업이 기술이나 지적재산권, 플랫폼을 독점하는 것도 금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수 노동의 중요성이다. 마케팅, 광고, 컨설팅, 금융업, 보험업과 같은 것들은 고임금을 받는 분야이지만 실질적으로 사회의 재생산에는 쓸모가 없다. 사용 가치가 없는 노동이 고임금을 받아 그쪽으로 사람들이 쏠리는 반면 필수 노동은 저임금인 탓에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 돌봄 노동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필수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순환할 수 있는 길이다.


​​

9. '두려움을 모르는 도시(fearless cities)'

시민이 직접 변혁을 일으키고 만들어나가는 사회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는 단체가 바로 '두려움을 모르는 도시(fearless cities)'다. 협동조합이 만들어내는 참여형 사회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해 그에 동조하는 세계 각국의 자치단체를 일컫는다.

그들이 2020년 1월에 발표한 기후비상사태선언에는 도시 공공 공간의 녹지화, 전력과 식량의 자급자족, 공공 교통기관의 확충, 자동차, 비행기, 선박 제한, 에너지 빈곤 해소, 쓰레기 삭감, 재활용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10. 3.5%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국적인 생활 양식을 버리고 변화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자본주의와 그것을 지배하는 1퍼센트 초부유층을 향한 싸움이 될 것이므로 에코백과 텀블러를 쓰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너무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 그저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본주의를 벗어난다는 것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의존하는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이 현실적인 논제가 될 수 있을까.

희망은 3.5%에서 얻는다. 하버드대학의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 연구진에 따르면 3.5% 사람들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들고일어나 진심으로 저항하면 반드시 사회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그레타 툰베리의 기후 학교 파업도 처음엔 혼자였다.


내용 정리는 여기까지.


​​​

더 이상의 설득이 필요할까.

기후위기로부터 지키려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다. 우리의 삶이다. 안전하고 공정하고 행복한 삶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돈과 권력을 위해 이익만을 쫓으며 과도한 노동과 소비가 뒤범벅이  채로 고작    마련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쳇바퀴에는 끝이 없다. 아무리 열심히 굴려도   쳇바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지구는 동력을 잃었다. 인류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여력이 남지 않았다. 기후위기는 허황된 믿음도 종교도 아니다.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지구 반대편 어딘가 누군가의 삶은 파괴되고 있다. 그리고 그 파괴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풍요와 연결되어 있다.

당신은, 우리는 지금 고작 물건 하나 갖겠다고 오픈런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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