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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Feb 21. 2022

나의 조급함은 훈련된 관성



과거를 떠올릴 때면 늘 야근 후 새벽 택시 안에서 바라보았던 차창 밖 풍경이 생각난다. 이러다 사고 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속으로 달리는 택시 안에선 피곤도 사라진 채 눈을 부릅뜨고 각성되어 있었다. 내가 일을 쫓았는지 일이 나를 잡아먹은 건지 알지 못했다. 나는 정말 그 일을 좋아했을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그때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지금도 모르겠다.


한 번 배운 자전거는 평생 가듯, 어릴 때 입맛 버리기 어렵듯 어린 어른의 시절에 나를 몰아붙였던 그때의 시간도 내 안에 달라붙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르는 또 다른 내가 되었다. 이제 다시는 그때처럼 살 수 없다고 장담하는 지금인데도, 그 시간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는 아직 조급하다.


가치관이 변했다. 그렇게 말하고 다닌다. 남의 눈치 보는 삶, 물건이 나를 장식해주던 삶이 의미 없어졌다. 샤넬백도, 람보르기니도, 시그니엘도 부럽지 않다. 기껏 비싼 밥 먹으러 가서 일회용 잔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너무나 헛되어 보이고 가죽백이 어디서 누구를 죽이고 온 것인지도 모른 채 그 화려함에 사로잡혀 오픈런하는 사람들도 안타까워 보일 뿐이다.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계절마다 새 옷을 사지 않는데도 괜찮은 내가 마음에 든다. 기념일마다 다 먹지도 못할 케이크를 사서 노래를 부르고 사진을 찍어 SNS에 전시한 후 몇 조각 먹다 냉장고에서 상하면 버리기 일쑤였던 그 짓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홀가분하다. 통장이 텅장되도록 속 빈 삶에 내가 번 돈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게 탕진잼보다 더 큰 꿀잼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내려놓지 못한 유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시간이다. 시간 앞에선 좀처럼 여유를 부리기가 어렵다. 늘 부족하니까. 시간은 항상 나의 성실함보다 한 발짝 앞에 서서 나를 이긴다. 나는 시간의 헐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24시간이 모자란 사람처럼 하루를 꽉 채워 보낸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 밥을 먹이고 어린이집 등원 전쟁을 치른 후 집 안을 대충 치우고 카페로 나가 일을 한다. 시간은 4시를 향해 달린다. 자꾸만 시간을 체크하며 빠르게 일을 해치우려 하지만 언제나 마무리하지 못한 채 끝이 난다. 조급한 마음을 잠시 구겨 넣고 아이를 데리러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긴다. 아이는 어린이집 문이 열리는 순간 다다다다 뛰어나가며 넘치는 에너지를 방출한다. 함께 동네를 한 바퀴 아니 두세 바퀴쯤 돌다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잘 준비를 할 때쯤 남편이 퇴근한다. 그 역시 나처럼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아이와 함께 방에 자러 들어간다. 


드디어 자유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영화를 보거나 요가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체력은 이미 방전 상태다. 일이 급할 땐 꾸역꾸역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그렇지 않을 땐 등 통증을 호소하며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조급한 마음을 거두지 못한 채로 하루가 마무리된다. 다시 아침이 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 하루가 시작된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은 나만의 쳇바퀴는 그렇게 돌아간다.


어떤 시절의 어떤 습관이 내 안에 뼛속 깊이 자리 잡아 이렇게 계획적이고 성실한 내가 되었을까.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는 것이 아무리 쉽지 않은 거라지만, 뭐든 다 놓치기 싫어 손에 꽉 쥐고 매일의 내 체력을 하나도 남지 않게 박박 긁어 쓰지 못해 안달인 모습이다. 남편에게 농담처럼 말한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럼 그가 웃으며 말한다. "뭘 하려고 하지 마."


내가 뭘 그렇게 쉴 새 없이 하려는 걸까. 난 그저 아이에게 매끼를 다 해먹이고 영상을 보여주지 않고 집안을 적당히 깔끔하게 유지하고 엄마도 아내도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의 생산성을 위해 프리랜서로 들어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할 뿐인데.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기면 마음이 설레 뛰어들 뿐인데. 환경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느린 걸음으로 하나씩 해나갈 뿐인데. 쓰레기가 싫어서 배달음식을 시키지 않고 매번 설거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인데.


그렇게 밤을 새우고도 출장길 비행기 안에서 문서를 보는 선배를 바라보면 마음이 지쳤다. 그 긴장감이 버거웠다.  무리한 요구를 거뜬히 해내야만 하는 걸, 몰아치는 시간들을 미워했다. 그럼에도 나는 견뎠고 함께했고 또 좋아했다. 그렇게 내 안에 체내 된 (남편 말대로) '뭔가는 하려는'습성은 여전히 남아 내게 조급한 발걸음을 걷게 한다. 


오랜 성실함의 시간들은 아마도 나를 꽤 강도 높게 훈련했나 보다. 애쓰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걸 보면 꽤나 강렬하고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나 보다.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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