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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May 02. 2022

체내 미세 플라스틱 함량이 명함이 된다면



사람의 몸속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된다는 건 이제 더 이상 소란스럽지도 않을 만큼 익숙한 일이 되었다. 대기 중에도, 빗물 안에도, 인간의 혈액 속에도 존재하는 필수 성분이 되고야 말았다. 종이컵에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건 미세 플라스틱보다 더 작은 나노 플라스틱 한 컵을 마시는 일이라는 게 알려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플라스틱을 돈 주고 사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플라스틱이라는 편의에 중독되어버린 탓이겠지.


어디 커피 한 잔뿐이랴. 크고 두꺼운 일회용기에 담겨 배달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음식들 안에도 플라스틱은 스며든다. 식사의 모든 과정이 플라스틱으로 시작해서 끝이 난다. 플라스틱 안에 든 음식을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먹는 사이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이 몸속에 들어갔을까. 매일 배달 음식을 먹고 일회용 컵에 커피를 마시는 생활방식이 요즘 사람들에겐 놀라울 것도 없을 만큼 일반적인 것이겠지만 몸속에 쌓인 플라스틱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면 너무 많은 양에 놀라 자빠질지도 모른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공포감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신용카드 한 장을 먹는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 그건 너무 작다.


모두가 플라스틱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라 해도 각자의 체내 플라스틱 함량은 음식을 담아 먹는 용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꽤 차이가 날지도 모르겠다. 친환경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생활 안에서 플라스틱 밀어내기에 열을 올리는 편이다. 카페에선 언제나 매장 컵을 요청하고, 테이크아웃은 언제나 스테인리스 재질의 텀블러에 담아 간다. 배달 음식을 시키지 않고 집에서도 음식은 언제나 유리 혹은 사기그릇에 담아먹는다.  누군가를 이런 선택을 유난처럼 바라본다. 하지만 이 유난이 체내 플라스틱 함량을 결정하는 결정적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 명품백을 자랑하는 것보다 있어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시되고 있지만, 만약 이게 눈에 보이는 것이 된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수할까. 업무상 명함을 건네야 하는 순간에 나의 탄소발자국 수치가 색깔로 표시된다면 어떨까. 상대의 명함은 초록색인데 내 것은 빨간색이라면 어떨까. 부끄러울까. 내가 누린 풍요가 반대 값으로 환경 채무처럼 드러난다면 어떨까. 수치스러울까. 그것이 곧 의식 수준을 드러내고 타인이 누려야 할 환경과 노동력을 착취한 증거로 남는다면 어떨까. 창피할까.


지금까지의 자랑으로 여겼던 모든 것들이 죄책감이 되어 숨기고픈 치부가 될까. 아니면, 꿈처럼 술처럼 취했던 편의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게 될까. 어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플라스틱에 병든 몸이 먼저 고개를 들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든 미세먼지 속에서 창문을 꼭 닫고 공기청정기를 트는 모순처럼 플라스틱을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시대는 돈과 명예와 권력의 피라미드 안에서 더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선망의 대상이었다면, 앞으로의 시대는 '체내 플라스틱 함량'이 그 반대 작용을 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어 사회에 균열을 낼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온다면 환경 의식은 양심과 비양심을 가르는 것을 넘어서는 절대적 가치가 되고 환경 감수성을 갖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능력치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야 할까, 바라지 말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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