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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Jun 19. 2024

시작은 가벼울수록


힘을 잔뜩 주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완벽주의 성향은 나를 너무 애쓰게 하곤 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학기 초에 항상 그랬다. 의욕에 불타올라 도통 여유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경직된 채로 시작을 맞이했다.


그러다 슬슬 적응하면서 긴장이 풀리면 내가 만든 루틴의 무게를 스스로 견디지 못해 지쳐버리곤 했다. 사회 초년생일 때도, 신혼 초에도, 육아를 시작했을 때도 나는 마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처럼 나를 괴롭혔다.


지쳤다는 건 0이 아니라 마이너스였다. 미래의 내 에너지를 당겨쓴 탓에 뒷심이 모자랐다. 회복이 느렸고 또 금세 지쳤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건강하게 만들어내지 못해 독기를 꺼내 써야만 할 땐 세상에서 가장 뾰족한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무게를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내려놓았다. 훌훌 털어내고 조금 더 허술한 내가 되고자 했다. 헐렁이가 된다는 건 참으로 찝찝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하루의 에너지를 다 쓰고 0이 되는 순간 셔터문 닫듯 하루를 마감하기로 했다. 충분히 쉬며 다시 100을 채우고 나닌 주어진 하루에 집중할 동력이 생겨났다.


이제 나에게 '시작'이란 한 듯 안 한 듯 가벼울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무언가가 되었다. 살랑거릴수록 기분 좋아지는 봄바람 같은, 은근할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잎차 같은 것. 그리고 그 가벼움이 만들어낸 여백 안엔 막연한 기대와 무모한 꿈들을 듬성듬성 넣어놓을 테다.


지금 이 글도 그렇게 가볍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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