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고자 했다. 아니 완벽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완벽이 제일 좋은 거라고 여겼다. 완벽할 수 없게 되는 상황들이 짜증스러웠다. 그러다 잠시 헷갈렸다. 속상했다. 고민스러웠다. 그리고 흔들렸다. 하루 삼시 세끼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데 물 흐르듯 반복되며 흘러가는 매일에 나는 과연 완벽할 수 있을 것인가.
힘에 부쳤다. 가족과 함께 살며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는 내게 취미에도 없는 요리는 집안일이고 노동이었다. 그 안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렇다고 흥청망청 고기를 먹는 일은 마음의 불편함만 안겨줄 것 같았다. 채식은 내게 당연한 제로웨이스트 실천 중 하나였다. 모르는 사람은 유난이라 할지 모르지만 현대사회 안에서의 육식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환경에 얼마나 부담을 주는 식생활인지 너무나 알아버렸기에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계란은 드세요?"
"아 대체로 안 먹는데 먹을 때도 있어요."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불변의 법칙처럼 지키는지 확인하는 절차다. 배려를 위한 질문일 경우엔 너무도 감사하지만 때로는 완벽하지 않음에 코웃음을 치는 반응을 견뎌야 할 때도 있다. 늘 의문이다. 왜 노력하는 사람의 불완전함을 가벼이 여기고 비웃는 것인지. 나도 사람이고 상황이 따라주지 않을 때도, 자제력을 잃어버릴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실천과 노력이 무의미할까.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왜 그래야 할까.
완벽할 수 없는 식생활에도 무너지지 않기 위한 적절한 타협점과 나만의 기준을 정했다.
1. 혼자 먹는 밥은 최대한 비건식을 실천한다.
2. 채식을 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비덩주의(눈에 보이는 고깃덩어리를 먹지 않음)'만큼은 지킨다.
3. 가족과의 식사는 해산물, 난류를 포함하는 페스코까지 허용한다.
4. 생우유, 요거트는 먹지 않는다. 내가 소비하는 건 비건 빵, 식품이지만, 타인에 의해 유제품, 버터, 계란이 들어간 빵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지면 적당히 타협한다.
5. 아이는 일반적인 육식으로 키우지만, 과도한 고기와 유제품 섭취에 주의한다. 어릴 때부터 채소를 좋아할 수 있도록 식단을 구성하고 가공식품 섭취는 최소화한다. 발암물질인 아질산나트륨이 들어있는 가공육은 먹지 않는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 이렇게 삼각형의 식생활은 이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삼각형의 균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집에 자주 오시는 친정 엄마 역시 기름기 없는 고기를 가끔 드시는 플렉시테리언에 가까워 사각형일 때도 꽤나 안정적인 편이다.
김에 밥을 싸서 생선을 얹어 아이를 먹이는 지극히 일상적인 저녁이었다.
"저녁으로 뭐 먹고 싶어?"
"생선!"
짭조름한 생선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고등어를 오븐에 구웠다. 아이와 단 둘이 먹는 평일의 저녁 식사. 계란찜에 당근과 애호박을 잔뜩 넣어 함께 먹으라고 주고 내 몫으로 따로 야채도 구웠다. 고등어 반 마리는 다섯 살이 한 끼에 다 먹기에는 많은 양. 이럴 경우엔 함께 먹는 걸 선택한다. 내가 먹지 않아 버리게 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나도 이럴 땐 나 자신에게 작은 숨통을 주고 싶어서 페스코식을 하는 편이다.
"엄마 왜 죽은 생선을 먹어?"
별생각 없이 고등어를 먹다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머리가 하얘졌다.
"뭐라고?"
"왜 죽은 생선을 먹어. 엄마 비건이잖아."
"너 비건이 생선 안 먹는 거 어떻게 알아?"
"나 그 정도는 알지~~"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걸 아이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비건의 개념을 자세히 이해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쨌거나 아이를 비건식으로 키우는 것은 아니라서 고기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만한 이야기를 한 적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너무 많은 고기를 과도하게 자주 먹는 탓에 엄마라도 안 먹으려고 노력하는 거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을 뿐이다.
어느 지점도 비꼬지 않은 아이의 순수하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가족 식사에 페스코를 선택하는 건 타협인 걸까 안주하기 위한 명분인 걸까. 속으로만 갈등하던 부분을 아이가 탁하고 건드렸다.
"네가 생선을 혼자 다 못 먹으니까 남으면 아까워서 엄마가 먹는 거야."
여전히 나는 불완전하다. 오히려 채식을 처음 시작했을 때 보다 더 모순적일지도 모르겠다. 계란을 먹을 때도, 안 먹을 때도 있는 나약한 채식주의자다. 매 순간 흔들리고 타협한다. 이런 나의 모습이 아이에게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을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속하는 이유는 나의 채식 실천이 시험에서 100점 맞기 위해 매일 공부만 하는 스트레스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차라리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점수가 정해지는 수능이라면 완벽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끼니에 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 불완전함 그대로를 인정하고 즐겁게 채식을 즐기고 싶다. 그럼에도 언제나 비건을 지향하고 싶다.
아이가 자라며 이런 대화를 하게 될 때마다 부족한 엄마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대해 공감하는 엄마와 아들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