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가 아닌 조금은 한적한 동네에 도착했다. 오밀조밀 작고 단정한 건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누군가의 일상이 이방인에게는 이국적인 영감이 된다.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던 오키나와 이후로 7년 만이다. 시내의 평범한 건물과 가게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보는 일.
도쿄도 정원 미술관
5분쯤 걸어 도쿄도 정원 미술관에 도착했다. 티켓을 끊고 걸어가는 길은 ‘정원’ 미술관이라는 이름답게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했다. 마치 숲 산책을 하는 느낌이 좋았다. 키 큰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언제 봐도 좋다.
조금 걷다 보면 그림처럼 미술관이 나온다. 화려하고 거대한 미술관이 아니라 단정하고 클래식한 미술관. 난 이런 게 왜 이렇게 좋을까.
일본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친한 선배가 알려준 미술관이다. 옛날 왕자의 저택이었던 곳인데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라고 추천해 줬다. 직접 가보니 역시나 왜 추천했는지 알 것만 같은, 취향에 딱 들어맞았던 곳이다.
도쿄도 정원 미술관은 아르데코 양식의 미술관으로, 원래는 황족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의 저택으로 1933년에 건축되었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아사카 왕은 유럽에서 유행하던 아르데코 스타일에 매료되어, 프랑스의 디자이너 앙리 라팽(Henri Rapin)과 유리 예술가 르네 랄리크(René Lalique)에게 내부 인테리어와 장식을 맡겼다.
이 저택은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일본 총리의 관저로, 이후 1974년까지 국빈을 위한 영빈관으로 사용되다가 1983년에 미술관으로 개관하였다. 2015년에는 본관, 정문, 다실이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백 투 모던(Back to Modern)’이라는 제목의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1950-70년대 서독의 그래픽 디자인에 관한 전시였다.
웰컴룸
전시를 보기에 앞서 웰컴룸에 잠시 들렀다. 앉아서 책도 볼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미술관의 건축적 요소를 볼 수 있도록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좋았다. 그만큼 이 미술관은 전시도 전시지만, 미술관 그 자체로 볼만한 곳이었다.
미술관 내에 사진 촬영은 허용된 공간이 따로 있었다. 그 외의 공간은 촬영이 불가했다. 우리나라 미술관은 요즘에 와서 대체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하는 반면 이곳은 좀 더 엄격해 보였다. 전시 설명을 파파고 번역기로 보려는데도 제지를 해서 번역하는 거라고 했더니 알겠다며 뒤로 물러섰다. (qr코드도 인쇄되어 있었는데..)
아르데코 건축 양식
한때는 왕자의 저택이었고 지금은 미술관이 된 곳. 내부에 섬세하고 미학적으로 꾸며진 아르데코 건축 양식을 보는 것만으로 감탄스러웠다. 일본 특유의 섬세한 집요함이 서양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데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았다. 장식적이면서도 기하학 패턴이 적용된 아르데코 스타일은 고풍스러워 보였다.
물론, 제국주의 시대의 이런 호화스러움은 많은 억압과 착취의 산물임은 분명하다:
백 투 모던(Back to Modern)
이제 기획 전시 감상 타임.
1972년 뮌헨 올림픽 픽토그램, 세계적인 항해 축제 ‘킬러 보흐(kieler woche)’의 그래픽들이 주요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바우하우스를 계승하려던 노력과 산업화 시대의 세련되고 모던한 감성이 느껴지는 그래픽들이 많았다.
또 제 취향이세요.
컬러의 조합과 모던한 디자인은 군더더기 없이 충분히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너무 세련된 느낌이었다.
2층으로
누군가의 집을 올라가는 느낌이네.
화려한 집.
(전시 작품은 촬영 금지)
앉아서 잠시 쉬는 공간이 이렇게 예쁠 일. 참 머물수록 화려하면서도 단정하고, 단정하면서도 화려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정원. 미술관에 들리지 않고 정원만 따로 티켓을 끊어 들어갈 수 있다.
갤러리 데이
참 좋다고 느꼈던 것 중 갤러리 데이라는 것이 있었다. 노인이나 유아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별도의 스페셜 한 관람일을 따로 정해놓았다는 점이다. 물론 평소에 방문해도 좋지만, 특히 미술관에서는 휠체어, 유아차 등이 있으면 주변에 눈치가 보이기도 하는 법이다. 느리게 천천히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날이 따로 있다는 게 너무 좋아 보였다.
신관으로
구관을 나오자마자 현대적인 미술관 느낌의 신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엔 카페와 굿즈샵, 또 다른 전시실이 있었다.
이곳은 촬영이 가능한 공간
과감하고 통통 튀는 그 시절의 색감과 디자인에 흠뻑 빠졌다. 독일 교통 박람회 포스터 너무 예쁘네. 화살표 3개 마저 예뻐보이고.
굿즈샵
이곳 굿즈샵의 특징은 오래된 그래픽, 우표, 티코스터 같은 것들이 많았다. 종이가 빛바랜 걸 보면 오래된 과거의 것을 실제로 보존하며 판매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원 탐방
미술관 내부도 아름다운데 정원은 더 좋았다. 왜 정원만 따로 티켓 내고 구경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복잡한 도심 속 요새 같은 느낌도 들고 여유 있게 산책하기도 좋은 느낌이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숨겨져 있는 듯한 연못이 나온다.
연못을 빙 두른 산책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얼마나 요새처럼 고요하고 좋은지.
그 끝엔 다실이 있었다.
차 마시던 공간인 다실. 창밖으로 보이는 초록을 보며 얼마나 여유롭게 그들만의 시간을 보낸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헤아릴 수조차 없겠지.
작은 정원을 나오면 널찍한 공원이 나온다. 별것 없이 큰 나무와 벤치가 전부이지만 이곳이 방문객들에겐 진정한 쉼터 같았다. 샌드위치 사들고 와 여기서 점심을 보내면 정말 일상 속 힐링일 것 만 같은 느낌이다.
언젠가 또 올 일 있을까.
아쉬워하며 바이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