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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기] 21_21 디자인 사이트에서 라멘 전시

by 흔적


노기자카역에서 내려 10분쯤 걷다 보니 키 큰 초록 나무들 사이 ‘21_21 디자인 사이트’가 눈앞에 나타났다.




친한 선배가 도쿄 갈 때마다 들린다는 곳이어서 실체는 모르고 이름만 익숙했던 곳이다. 흥미로운 전시가 많이 열린다고 해서 현대미술관처럼 큰 건물을 상상했는데 막상 마주한 건물은 단층짜리의 작은 미술관이었다.




왜 21_21일까

이름이 참 독특한 곳이다. 21_21 디자인 사이트는 일본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와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이상적인 시력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 ‘20/20 vision’에서 한 발 더 나아가 21세기의 디자인을 바라보는 선견지명의 시선이라는 의미를 담아 21_21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디자인을 다양한 시선에서 접근해 사회, 환경, 기술, 라이프스타일을 다룬다고.





역시 안도 타다오라 그런가 건축물의 외형이 심플하면서도 독특했다. 마치 땅으로 들어가는 듯 기울어진 모습. 안도 타다오의 상징과도 같은 노출 콘크리트, 미니멀리즘 그리고 파란 간판.





이곳의 시그니쳐 색인 파란색은 간판에 이어 굿즈에도 적용되어 있었다. 자기다움은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게 되어있다.





전시관은 지하에 있었다.​ 밖에서 건물이 너무 작아 보인 이유가 있었다. 매표소와 굿즈숍만 1층에 있고 계단을 내려가야 전시를 볼 수 있었다. 건물 자체로 독특하기도 하지만, 안도 타다오라니까 괜히 한 번 더 두리번거리게 되는 느낌이다. ​밖에서 보기에 창이 작았는데 안에서 보니 지하로 이어져 매우 큰 통창이었다. 이렇게 하면 지하이지만 외부 햇빛을 지하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 같다.



라멘 인 재팬(Ramen in Japan)




라멘과 관련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의 주제나 작품이 너무 난해하거나 어려우면 가족들 함께 오기 애매할 수 있었을 텐데 아이가 보기에도 어렵지 않은 친숙하고 쉬운 주제라서 다행이었다. 남편도 흥미미로워 했고.


도쿄를 여행하면서 느낀 건 라멘집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라멘에 진심인 나라. 라멘으로 전시까지 하는구나. ​라멘은 중국의 국수에서 유래했지만 일본만의 독자적 레시피가 결합되어 일본만의 독특한 식문화가 되었다.



라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카테고리를 다 세분화해서 보여주는 전시였다. 라멘 그릇을 시대별, 지역별, 디자인별로 보여주고 라멘의 식재료와 요리 과정도 요소별로 하나하나 다 나누어 나열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도 참 일본스럽다고 느껴졌다.





라멘 그릇도 지역마다, 브랜드마다 이렇게 다르다니.​

확실히 이렇게 보여주니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식문화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식재료를 하나하나 나열했다. 소금, 물, 밀가루 등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나누어 보여주었다. 기름도 종류마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당연한 듯 재료로 나열되어 있는 동물성 원료들을 보며 이제 비건 라멘도 다룰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혼자 해봤다.) 라멘을 담는 그릇마저 진동과 소리를 느껴볼 수 있었다. 조용한 듯 다채롭게 모든 감각을 자극하는 전시였다.



식재료 전시를 지나 공간과 디자인의 전시로 들어왔다. 거대한 라멘 식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인 공간의 모습부터 디자인 요소에서 확장되는 브랜딩의 차원까지 정말 라멘으로 할 수 있는 건 다하고 있는 듯했다.





과거의 라멘 그릇들은 좀 더 거칠고 날 것이며 더 예술적인 느낌이 들었다. 색도, 도자기의 느낌도, 자연스러운 결도 모두 아름다웠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만들어낸 것들만이 가지는 분위기와 가치는 언제 봐도 참 좋다.





라멘을 담는 주요한 그릇인 도자기의 종류와 그 재료가 되는 흙까지 종류별로 볼 수 있었다.

흙으로 만든 물건들을 예술의 영역과 의, 식, 주로 나누어 카테고리를 보여준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흙의 순환




전시의 마지막은 흙의 순환이었다. Clay Circulation.

식기가 만들어지고 분쇄되고 그렇게 재활용된 흙으로 다시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고 다시 분쇄되는 순환의 과정.



도자기의 원료인 점토는 무한한 자원이 아니다. 다른 많은 자원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고갈의 우려에 노출되어 있다. 미노(지역명인 듯)는 1990년대부터 필요 없는 식기를 회수하는 네트워크를 전국적으로 구축하였고 이것을 분쇄하여 원료 화한 '세르벤'이라 불리는 재료를 활용한 제품 개발에 힘써왔다.

대략 이 정도 의미인 듯.




도자기를 다시 모아 도자기로 만드는 순환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흥미로웠다. 도자기는 ​흙으로 만들기 때문에 흔히들 친환경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1200가 넘는 고온의 가마를 견뎌낸 도자기는 소각하기 어려운 불연성 폐기물이다.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썩거나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더구나 도자기의 주재료가 점토이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유약의 원료로 다양한 성분이 섞여 사용되기 때문에 폐기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복합재질인 셈이다.

일본처럼 전국적인 시스템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순환 시스템을 구축한 곳이 있다. 바로 제로웨이스트샵 '알맹상점'과 도예 브랜드 '아누'의 협업이다. 알맹상점에서 수거하고 아누에서 재활용하여 새로운 화분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최근에는 깨진 그릇을 다시 붙이는 일본의 도예 기술인 킨츠키 기법이 알려져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하는 도예 공방들도 있다. 깨진 그릇을 뭣하러 다시 붙이는 수업까지 듣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물건을 소중히 여기며 고쳐 쓰는 제로웨이스트를 넘어서 또 하나의 공예 기법 중 하나로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니 그림을 그리는 코너가 있었다. 라멘 그릇을 디자인해 볼 수 있게 종이와 색연필이 테이블 위에 마련되어 있었다. 다 그린 건 수거함에 제출하고 가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이런 거 아이들만 체험하고 어른들은 옆에서 지켜보는 게 일반적인데 이곳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서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내 옆자리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앉아있었는데 라멘이라는 영어 스펠링을 새롭게 디자인해 사선으로 그리고 열중해서 색칠하고 계셨다. 그 모습이 뭔가 재미있었다. 어른들도 창의와 영감에 진심인 모습이 순수하고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그렸다는 이야기.

베지터블 라멘 주세요.





라멘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전시였다. 이렇게 다차원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해부하듯 나누어 바라보는 시선은 다수에게 공감되는 문화를 만들 때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는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적이니 그 어떤 것 보다 강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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