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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Jul 04. 2019

영화 '기생충'이 남긴 잔상




기생충이라는 단어는 흔하지만, 그 단어가 우리 사회를 대변하고 누군가를 상징하게 되는 순간 아주 강한 임팩트를 지닌다. 나와 다른 타인을 쉽게 혐오하면서 '..충'이라고 가리키는 망설임이 없는 사회. 지금 내가 살아가고 관계 맺고 있는 울타리의 정서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이 이전에 보여줬던 '설국역차'나 '옥자'만큼 블록버스터에 해외스타가 총출동하지 않아도 더 강렬하게 계급사회를 풍자하고 예민하게 한국적인 정서를 내풍기고 있다. 영화의 에피소드가 절정으로 치닫으면서 영화관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있는 어떤 중년부부가 마치 막장 일일드라마를 보는 듯 추임새를 넣는 것이 영 신경 쓰였었다. 그런데 문득,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지만 실은 지극히 현실을 닮은 막장 드라마들의 매우 우아한 버전이 아닐까 생각했다. 


'기생충'의 이야기는 환상이지만, 그럼에도 다들 현실을 곱씹어 보는 이유는 그 이야기들 속에 들어있는 상황과 관계, 감정들이 지극히 지금, 여기, 우리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데칼코마니



'기생충'의 원래 제목은 '데칼코마니'였다고 한다. 기생충만큼 임팩트 있는 제목은 아니지만, 데칼코마니 역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기생충이 부자 가족을 숙주 삼아 기대어 살아가는 가난한 백수 가족에 포커스를 맞춘다면, 데칼코마니는 전체를 바라보게 한다. 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지만 결국 이쪽이나 저쪽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닮은 닮지 않았고, 닮지 않은 하지만 어딘가 닮은 구석도 있는 등장인물들의 모습들. 


영화에서는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로 나누어 그 단면만을 보여주지만, 숙주에겐 또 다른 기생충이 존재했던 것처럼 이런 갑을의 관계와 상생은 고구마 줄기처럼 끝없이 이어져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엔 하나의 숙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피라미드 맨 꼭대기의 숙주는 수많은 기생충들을 어르고 달래 그들의 삶과 시간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니까. 


영화가 구성된 스토리는 심플해서 몰입도를 높이지만, 그로 인해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들은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좋은 결말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냄새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는 숙주와 기생충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동시에 숙주가 기생충을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 박사장(이선균)이 그의 운전기사인 기태(송강호)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감지하고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아마 반지하의 습하고 눅눅한 곰팡이 냄새일 거다. 


"지하철 타는 놈들한테서 나는 냄새 있잖아~"


무심하게 지나간 이 대사가 나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데, 계급을 잘게 쪼게고 나누어 그 사이사이를 촘촘히 선으로 그어 서로가 서로를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우리 사회를 표현하는 말인 것 같았다. 박사장은 그 지독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그(송강호)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각자가 자기선 아래는 냄새나는 기생충으로 바라보지만, 자기 위에 있는 선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올라가고 싶은 계단처럼 바라다본다. 그래서 선을 넘지 않는다는 말은 관대한 듯하지만, 가장 잔인한 말이다.


묘한 건 영화에서는 숙주를 그렇게 악역으로 몰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원래 너그럽고 착하다. 돈이 많으면 여유 있고 관대할 수 있고, 그들을 이용하는 건 불을 켜면 재빠르게 도망가버리는 기생충 들일뿐이다. 기생충들이 혈투를 버리는 시간에도 숙주의 시간은 느리고 평화롭게 흘러간다.










계획



영화를 보는 내내 '계획'이라는 단어도 여러 번 등장했는데, 의도적으로 많이 쓰인 대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획 없이 피자박스나 접으면서 살아가는 백수 가족은 가지고 있으면 재물이 들어온다는 할아버지의 수석을 들고 느닷없이 찾아온 아들 친구가 소개해준 과외 알바에 치밀한 기생충 생활에 돌입한다. 온갖 술수로 다른 기생충들을 몰아낸 후 가족 전체가 완벽하게 숙주에게 기생하게 되지만, 숙주에겐 그들보다 더 경악스러울 정도로 음침한 기생충들이 존재했다.


무계획의 표본과 같은 기태(송강호)가 또 다른 기생충에게 '넌 계획도 없냐'라고 화를 내며 묻는 장면은 아이러니 그 자체인 듯했다.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파탄이 나버린 후,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질문에 아버지인 기태는 '다 계획이 있다.'라고 대답한다.


그 계획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었다. 어차피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계획을 세우지 않는 자들은 자신에게 닥친 재난도, 불행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거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한 집안의 가장이 풀어놓는 푸념 섞인 계획론에 나는 일부분 공감했다. 


인생을 몇 년 단위로 거창하게 계획하고 내 시간들을 손에 꽉 쥔채로 아등바등 살았던 시간들 보다, 내가 하루를 즐겁게 보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일상을 더 여유 있게 만들어줬다. 계획을 위한 계획들이 나를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거나 하나라도 더 갖게 해 주었었나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계획'이라는 것이 내 삶의 시간들에 반드시 좋은 것들만 가져다주었던 것을 아니었다는 걸 생각했다. 


계획은 마치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진정성의 이미지를 내뿜어왔던 단어이지만, 사실 계획은 그냥 계획일 자체를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덧씌우는 것이 무의미한 것 같다.







*여기에 쓴 내용들은 모두 영화에 대한 해석이라기보다는 영화로 인해 생각하게 된 삶과 현실에 대한 잔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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