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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Jul 12. 2019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은행에 들렸다 점심을 먹고 얼마 전 산 옷이 불량이라 옷가게에 들러 교환하고 집에 돌아가는 평일 오후의 이렇다 저렇다 할 것도 없는 시간들. 지하철 출구를 나와 마을버스를 타러 가던 길목이었고 이어폰에서는 랜덤으로 재생되는 수많은 노래 중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들어서 너무도 익숙한 유재하의 목소리와 그만의 감성은 오랜만에 들어도 여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마음이 일렁인 이유는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라는 말이 너무도 특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를 내 마음에 비친 그대로 바라본다는 건 나답게 산다거나 나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표현으로는 한없이 부족한 나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라니. 왜 여태 이 말의 의미를 몰라봤을까. 










서른다섯의 나를 울린 스물다섯의 유재하



가사를 곱씹으며 듣고 있자니 그 자리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을버스를 한가득 메운 하교 중인 학생들에게 실연당한 이상한 어른으로 보일 것 같아 애써 다른 곡을 재생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반복 재생을 하며 마음껏 가사를 다시 되새겨 보았다. 수첩 맨 뒷장에 필사를 해보기도 하며 짧은 가사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는 도대체 스물다섯에 어떤 마음으로 이런 가사를 썼을까. 그는 담백하다 못해 무덤덤하게 일기장에 적듯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더 듣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고 가사를 되뇌다 보면 아프면서도 공감이 되고 위로가 된다. 억지로 위로하려고 하지 않아서 더 위로가 되고 자기의 마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쓴 한 글자 한 글자를 허투루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그가 적어 내린 이십 대의 치열한 방황은 삼십 대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 아직도 힘들고 어리고 어설픈 어른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듯했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로 감추며

한숨섞인 말 한 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가리"


 








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내가 나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모습에는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나 내가 나조차 속이며 나에게 애쓰는 마음들이 가득하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더 괜찮은 내가 되길 바라는 마음들 때문에 내가 아닌 모습을 나조차도 모르게 덧씌우곤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아닌 내 모습을 남들에게 어필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자격지심을 부리기도 하다가 맘에 없는 소리들만 늘어놓게 될 때도 있다. 내가 쓰는 내 글에도 다 안담길 듯한 내 마음에 비치는 나는 화장을 지운 모습처럼 자연스러운 민낯일 수 있을까. 나는 그 민낯을 스스로 얼마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 받아들이며 살고 있을까. 적어도 어느 날 거울에서 두꺼운 화장으로 나를 감춘 추악하게 나이 든 내가 비춰지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원래 유약하고 느리고 조금 예민한 사람이다. 고민한 걸 또 고민하고 끝없이 망설이는 편이지만, 때로는 충동적이기도 하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이나 상황에 적응하는 걸 어려워하고 또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갖는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태어난 이런 기질들이 사회에선 용납되지 않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나는 빠르게 대처하려고 노력했고 서툴면서도 우선 따르려고 하는 습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심하게 지나친 나의 마음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두컴컴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고 나서 갑자기 나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래서 그 마음들을 조금씩이라도 봐주지 않으면 밀려드는 파도에 익사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릴 때 싫어했던 순간들을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나가고 나 혼자 급하게 신발 끈을 묶는 순간이었다. 나는 남들의 타이밍에 맞추려고 제대로 묶지도 못한 운동화를 대충 신고 나와 서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끈을 다시 고쳐 묶곤 했다. 애초에 제대로 묶고 나와도 늦지 않았을 텐데, 나는 왜 나에게 괜찮아하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다시 풀어서 처음부터 순서와 속도대로 다시 신고 묶어보고 싶다.


내가 나를 다독여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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