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적 Jul 29. 2019

공간의 인구밀도

백화점 팝업스토어보다 인기 많은 미술관



입덧의 고통으로 두 달을 잠수 아닌 잠수생활을 보낸 나는 7월이 되면서 조금씩 상태가 나아지자, 미팅을 계기로 틈만 나면 나돌아 다니며 그간의 한을 풀고 있다. 물론, 일도 있고 컨디션이 매일 허락되는 것은 아니라서 뱃속의 아이에게 컨펌을 받으며 며칠에 한 번씩 기회를 노리는 식이다. 


지난주는 이런저런 일들로 오랜만에 사람들 북적거리는 핫플레이스를 방문하게 되면서 평일 낮에도 줄을 서야 하는 서울의 인구밀도를 제대로 실감했다. 하필이면 안국역 핫플의 쓰리콤보와도 같은 햄버거 맛집 '다운타우너'와 카페 '어니언', '블루보틀' 삼청점을 하루 안에 방문하게 되었다. 마치 사람 많은 곳만 골라서 찾아다닌 셈이다. 평일 낮에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은 나 하나인 줄 알았는데, 다들 직장 그만두고 나 같은 디지털 노마드가 갑자기 많아진 건가? 다들 뭐하는 사람들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성별과 나이, 옷차림의 사람들을 한 공간 안에서 마주했다.










공간의 인구밀도에 대한 평소 내 생각은 이렇다. 



'공간의 경험을 완성하는 건 인테리어도 음악도 아닌 그 안의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수다의 데시벨과 태도, 제스처 같은 것들이 그 공간에 대한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아무리 감각적인 카페도,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나 호텔도, 우아한 미술관도 아수라장이 되는 건 한 순간이다.'



다양한 공간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서  나는 점점 이 공간의 인구밀도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애초에 테이블이 다닥다닥 붙여진 카페보다는 작아도 여유 있는 카페를 선호하게 되었고, 바(bar) 형태의 맛집들을 더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인구밀도를 적절히 조절하기 위해 애초에 공간 구성에 세심하게 힘을 쓴 흔적이 느껴지는 공간에 가면, 그만큼 나도 여유를 느끼고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문제는 나도 한 번 가봤으면 싶은 공간은 남들도 가고 싶어 하고, sns에는 안 가보면 안 될 것 같은 욕구를 자극하는 공간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수많은 핫플레이스 중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고르고 골라 시그니쳐 메뉴를 맛보고 인증샷을 찍는 취미에 요즘은 좀 시들해졌지만, 그렇다고 여유 있으면서도 만족감을 주는 감각적인 공간을 찾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백화점 팝업스토어보다 인기 많은 미술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서울시립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전'을 다녀온 후부터다. 줄 서는 미술관은 대림미술관이나 디뮤지엄, DDP 이외에는 경험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전시는 내가 본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 중 최고로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 전시 마감 일주일을 앞둔 시점인 데다가, 방학 시즌이기도 해서 어느 정도의 북적거림은 각오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오픈하자마자 갈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갑자기 일이 생기면서 가장 사람이 많은 시간인 오후 3시에 미술관에 방문하게 되었다.


역시나 미술관 안팎은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따로 마련된 포토존에도 사진을 찍기 위해 대기줄이 있었고, 1층에 따로 마련된 기념품샵에도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짐 보관함에 가방을 넣고 스마트폰과 리플렛만 들고 가볍게 제1전시실로 향했다. 다행히 들어가기 전엔 대기줄이 없었지만, 전시실 안에서는 작품을 볼 때 대기줄을 서야 했다. 앞사람이 걸음을 옮기면 나도 딱 그만큼 옮길 수 있을 정도였다.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관람객들은 더 하나하나 자세히 작품을 들여다보고 쓰여있는 설명을 읽는 듯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하나하나 열심히 작품을 감상했다. 한 발 한 발 옮겨가며..


내부가 더웠는지 부채질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었다. 그런데 곧 있으니 나도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더웠다. 인파를 빠져나와 잠시 더위를 식힐 곳을 찾았는데, 어디에 가도 더위가 사그라들지 않았고, 조금씩 식은땀이 났으며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다. 내가 사람 많은 공간에 취약한 임산부라는 사실을.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져 벽에 기대려고 할 때쯤 미술관 스텝 한 분이 나를 발견하고, 나가서 쉬고 오시면 다시 들어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전시실에서 나와 벤치에 앉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휴식을 취했다. 순간적으로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져서 공포감을 느낀 후였다. 그리고 검색해보니 임산부에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호흡곤란 증상이었다. 어떤 사람은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호흡곤란을 느끼기도 했단다. 나는 그 자리에서 30분이나 안정을 취하고 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벤치에서 바라본 전시실 입구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몰리자 줄을 세워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명품샵 앞에 인원을 통제하기 위해 세우는 줄이 생각났다. 매장 안에서 고객들이 여유 있게 쇼핑을 할 수 있도록 꽤나 엄격하게 인구밀도를 신경 쓰는 명품샵들. 그 어떤 백을 살 때 보다 더 치열하게 자리 경쟁을 해야 하는 예술가의 전시라는 것이 어딘가 묘하게 느껴졌다. 기념품샵은 백화점 팝업스토어보다 인기가 많은 듯했다. 나도 결국 그 틈에 끼어 엽서와 포스터를 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나는 몸상태를 고려해 너무 열성적으로 작품을 감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전시 관람을 모두 마쳤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 소중했지만, 그 날의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이 과연 어떤 색으로 남겨질까를 생각해보면, 더웠던 공기와 매우 높았던 인구밀도가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적당한 밀도



서울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 산다. 약 5,170만 명 중 975만 명이 서울에 산다. 대충 계산해봐도 전 국민의 19%가 서울에 살고 있으며, 경기도까지 합치면 44%에 육박한다. 거의 절반 가까이가 서울을 중심으로 모여 살며 그 생활권을 이용하고 있다는 셈이 된다. 어딜 가든 사람이 많은 공간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숫자로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특히나, 미술관 같은 예술, 문화에 대한 경험은 서울에 매우 편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명한 작가의 전시에는 당연히 사람이 몰리고, tv에 나온 맛집이나 sns에서 핫한 카페에는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다. 다만 너무 좁은 공간에 모여 살다 보니, 어딜 가도 적당한 인구밀도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뿐이다. 


물론,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을 원하는 건 아니다. 카페든, 미술관이든, 공원이든 누군가가 함께 있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꽤나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한편으로는 괜찮은 공간이라는 안심을 주기도 한다.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할 때도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적당히 텐션이 유지되는 걸 느낀다.


감각적인 공간에서 적당한 인구밀도로 너무 외롭지도 너무 북적거리지도 않는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일상 속에서 쉽게 얻어지지 않기에 더 간절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그런 때를 마주하게 되면 그 시간과 공간을 더 마음껏 만끽하고 싶어 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