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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Aug 10. 2019

로컬살이의 시작



전에 살던 곳은 서울의 한 오래된 아파트였다. 


서울에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지였다.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된 아파트는 낡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서울'과 '아파트'라는 것은 한두 푼으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뿌듯하게 그곳에서 내 생활을 시작했다. 둘이 살기엔 넓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로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조금 더 넓고 쾌적한 곳에서 아이와 함께 지낼 곳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살던 동네는 새 아파트들이 대규모로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집값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낡아빠진 우리의 아파트도 덩달아 두배가 되었다. 고민은 깊어졌다. 


'이 돈 주고 여기서 살아야만 할까?'


새 아파트에 분양권을 넣어보기도 했지만, 낙방하기 일쑤였다. 대기번호표까지 받아서 들어갔다가 바로 앞에서 마감이 된 적도 있었다. 허무함이 쌓이는 사이에 집값은 더 치솟아 서울에서는 더 이상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이제는 당첨이 되어도 문제였다. 위치와 동네가 좋지 않아도 집값은 그런 거에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하루가 다르게 야금야금 올랐다.


결국, 남편이 제안했던 새로운 동네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말로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 동네였는데, 그땐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었다. 낯설기도 했고 남편의 직장이 조금 멀어지는 것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사는 아파트에 계속 살기도 싫었기에 나는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보았다. 서울에 아주 인접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으니 아주 지방은 아니었다. 남편의 직장동료들 중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도 셋이나 되었고 다들 적응해서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나야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일이 있을 때만 서울에 나가면 되는 거고. 서울에 놀러 나가고 싶을 때 조금 더 일찍 준비해서 나가는 것만 감수하면 될 일이었다. 이제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입장이 되기도 했고.


시간이 참 빨라서 눈떠보니 새로운 집에 와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 온 지 열흘



아직은 적응이랄 것도 없이 모든 것이 새롭다. 집안이나 밖이나 새로운 환경에서 나의 일상을 만들어나가는데 분주하다. 매일 짐 정리를 하면서 인터넷으로 물건들을 주문하고 집 앞 마트와 편의점에도 가보고 처음 가보는 음식점에서 밥을 먹는다. 어디에 살든 이 모든 것들은 늘상 하던 일이라 낯설 것도 없다. 다만, 내 생활에 맞게 공간을 재구성하고 안 가던 길을 가보며 이곳에 익숙해져가는 과정을 겪을 뿐이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 회원가입도 하고 책도 빌렸다. 예전에 다니던 곳에 비해 작은 규모의 도서관이라 책의 양이나 종류가 매우 적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뭐, 그 많던 책들 다 빌려봤던 것도 아니잖아.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읽고 싶었던 책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떤 책을 만나 또 어떤 생각들을 하며 살아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고 그 정도는 우연에 맡기며 살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남편의 직장동료에게 저녁 초대를 받아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오히려 서울에선 동네 친구가 없었는데, 여기선 건너편에도 아는 사람이 살고, 그 건너편에도 아는 동네 주민이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아이 없이 둘이 살고 있는 부부의 집에 방문했다. 뒤늦게 이사 온 우리에게 동네 맛집들을 소개해주며 이곳에 살면 좋은 점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를 들었다. 남편은 오랜만에 신났는지 자기 아내가 임산부라는 사실도 잊고 열두 시가 넘게 그 집에서 아이처럼 게임을 했다.


생각해보니, 열흘이 금새 지나갔다.










서울 가기



내가 사는 곳은 뉴타운이라 동네에서의 삶도 훨씬 더 쾌적한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주변의 편의시설이나 공원도 단정, 깔끔 그 자체다. 하지만, 가장 달라진 건 집안에서의 시간들이다. 예전에 그 작은 집에 구석구석 처박아 두었던 짐들이 토하듯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선 공간이 부족하지 않다. 서울에선 절대 우리가 가진 돈으로 구할 수 없는 크기다. 아이방도 따로 줄 수 있고 내 작업실도 따로 가질 수 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필요로 했던 라이프스타일은 나만의 공간을 따로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서울에서 떨어져 나왔음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불편해하지도 않던 시간을 보내다가 바로 어제 혼자 서울로 외출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일주일에 한 번 팟캐스트 녹음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휴가라서 데려다 줄 수도 있었지만, 이사 와서 한 번도 이용해 보지 않은 대중교통을 경험해볼 생각이었다. 이제 알아둬야 하니까. 대략 한 시간 반의 거리. 네이버 지도는 마을버스 한 번, 지하철 두 번을 갈아타서 가라고 추천했지만, 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시간도 별 차이가 없었고 한 번에 서울 가는 버스를 타고 근처에서 한 번만 더 갈아타는 방법이 더 편할 것 같았다.


그야말로 뙤약볕 내리쬐는 낮시간에 집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20분 정도 기다렸지만, 그래 그 정도 배차간격은 이제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어컨이 약한 시외버스의 맨 뒷자리에 몸을 싣었다. 가면서 읽으려고 일부러 책도 챙겼다. 기다리는 시간때문에 조금 지체되었지만, 버스는 빠르게 달렸다. 역시 차가 안 막혀서 좋았지만,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한 정거장 전진하는데 거북이걸음이었다. 녹음시간이 다가와 내 속이 새까맣게 탈 때쯤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급히 지하철역으로 뛰어내려가 환승을 한 후 예정보다 10분이나 늦게 녹음을 시작했다. 빡빡하게 1시간 40분이 걸렸으니, 앞으로는 2시간을 잡고 집에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갈 때는 그나마 양반이었다는 사실. 왜 나는 멍청하게 그 버스의 배차간격이 당연히 20분 정도 일거라고 생각했을까. 30분 후에 온다고 쓰여있는 버스를 정류장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다 겨우 타고 보니, 40분이 넘게 흘러있는 게 아닌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도 한참이었다. 버스 기사님도 차가 막혀 짜증이 나셨었는지, 길이 뚫리기 시작하자 난폭 운전을 하기 시작하셨다. 사람들이 채 내리지도 않았는데 문을 닫아버려서 "저기요 내릴게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야 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쾌적한 우리 집으로 귀가했다.











로컬살이



물론 서울에 가는 더 빠른 경로들이 두세 가지 정도는 더 있는 듯하다. 내가 잘 몰라서이기도 했고 3번이나 환승하는 것의 불편함을 겪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이제는 이런 것에 불편해하면 내 몸이 고달파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버스 기사님이 난폭 운전을 하시던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가져간 책 마저 다 읽어버린 나는 멍 때리며 앞을 바라보다 나는 앞으로의 내 삶을 '로컬살이'라고 정의하고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먼 길 돌아온 대신 글감을 얻었으니, 그럭저럭 어제 하루는 나름 괜찮은 하루였다고 해야 할까. 


서울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먼 지방도 아닌 곳. 수도권의 정확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시골도 아니고. 그럼 '로컬살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지역'이란 단어를 영어로 바꿨을 뿐이지만, 왠지 느낌이 다르다. 마침 엊그제 빌린 책 중에 로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책이 있었다. 목차에서 '더 이상 도쿄에 살지 않아도 되는 이유'라는 말을 본 것 같다. 얼른 읽어봐야지.


지내면서 조금씩 여기 살아서 더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되고 불편한 점도 발견하게 되겠지. 나는 그저 서울에서 떨어져 나온 것에 대한 불평보다는 여기서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해보고 싶다. 제대로 된 '로컬살이'는 무엇인지, 내가 만들어가는 삶의 모습은 어떤 형태일지 실험해보고 싶다. 아직은 무언가에 대한 기회도, 문화시설도 턱없이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지만, 분명 여기에서도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며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언젠가 나도 책에서 처럼 누군가에게 '꼭 서울에 살진 않아도 돼'라고 말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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