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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Sep 03. 2019

불편은 나의 영감



안락한 집에서 눈을 떠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멍 때리며 바라본다. 갓 구운 빵 한 조각에 고소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뭘 할까 고민한다. 몇 달 전에 예약해두었던 해외여행을 떠나는 길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모두가 날 좋아해 주고 어딜 가든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것이 지극히 익숙한 일상이다. 돈이든 행복이든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무탈하게 나의 삶이 흘러간다.


이런 삶은 행복한 삶인가. 아니, 가능한 삶인가? 힘든 삶의 굴레에 지치다 보면 단 하루의 늦잠이 간절해지고 그저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사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막상 아무런 자극이 없는 평탄한 삶이 주어지게 된다면 나라는 인간은 과연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될까.











불만은 나쁜 것?



충분히 100퍼센트 꽉 채워 만족스럽지 않은 것. 어딘가 조금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끼는 것. 이런 것들은 살면서 나에게 어떤 조급함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때로는 분노와 불안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하지만, 적당한 자극이나 충격으로 나는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했고 여태껏 생각하지 못했던 고민을 시작하기도 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성장을 요구하는데 그 안에서 그저 모든 것에 적당히 만족하고 넘어가기만 한다면, '다음'이라는 건 존재할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친구들에게 '프로고민러'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어떻게 일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 같은 것. 어릴 땐 만나기만 하면 친구들에게 그런 고민들을 끝없이 늘어놓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각자의 현실도 팍팍한 친구들에게 한없이 우울한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고민을 멈출 수는 없었다.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때론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고민이 없이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고민은 바꿔 말하면 생각하는 시간이다. 어떤 것이 좋을까, 내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질문들은 아무리 해보고 답을 해보아도 끝이 없다. 그렇게 나는 그 캄캄한 길에서 한 발 한 발 스스로 내딛으며 고민을 연속하는 사람이 되었다. 


많은 독립 서적들이 자기의 감춰왔던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서 공감을 얻었다. 얻고 있다. 그 주제를 살펴보면, 주변 지인들에게 조차 말하면 치부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겨질 법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이라고 여기던 실패의 경험이나 우울의 감정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왜일까. 어쩌면, 모두가 사람들을 만나 떠드는 수다 속에서 정작 속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했던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드러내지 못했던 마음들을 그런 글들 속에서 위안받는 것이 아닐까. 


비슷한 내용의 글을 올해의 시작점에도 쓴 적이 있다.













불편한 감정



나의 성향은 긍정의 아이콘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그렇게 비관적인 사람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불만이라는 지점이 반드시 불행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땐 무조건 희망차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게 닥친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겼다. 나도 모르게. 하지만, 언젠가부터 무작정 밝고 긍정적인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사회에서 학습되었고, 어두움이나 낙담, 우울 같은 감정이 두려워 기피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며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것들은 '불편한 감정'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조차 괜찮다고 넘어가는 것이 과연 좋은 긍정인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꼭 이래야 할까,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남기는 것들. 세상의 일에서부터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나의 내면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어느새 '프로고민러'에서 '예민하다'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좋게 말하면 섬세한 거라며 해주던 이야기들. 뭐 처음엔 과연 이게 좋은 뜻인가 싶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다지 나쁜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민하다는 말이 반드시 모든 것을 안 좋게 받아들이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다는 뜻을 가진 것은 아니니까. 예민해서 글을 쓸 수 있고 예민해서 일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게 되었으니, 나에게는 그 예민이 타인에게 상처 주는 감정으로 발휘되지 않게만 조심한다면 아주 감사한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불편은 영감이라는 모순



불편한 감정들을 찬양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살다 보면 이 불편한 감정들에서 벗어나서 살게 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울 뿐이다. 삶이 나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도 많고,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강요나 상처가 되는 말들, 뒤돌아서 몇 번을 생각해도 화가 풀리지 않는 일들이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와 나를 대단히 불편하게 할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무작정 드는 생각은 '어디 조용한 외국에 나가서 이런 상황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거다. 


하지만,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없고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일상 안에서 조금씩 그런 감정들을 해소하고 풀어낼 방법들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면서 기분을 환기할 기회를 갖기도 하지만, 그걸로 쉽게 털어지지 않는 마음들도 있다. 그럴 땐 마음속에만 두고 끙끙대다가 어느 순간 글로 내보낸다. 나에게 불편은 곱씹고 곱씹어보다가 머릿속에 흩어진 단상들을 글로 풀어내게 해주는 영감이 된다.


불편은 분명 좋은 감정이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의 원인이나 속성, 상황들을 떠올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게 이전과는 다른 관점이나 생각들을 갖게 한다. 묘하게도 글을 쓰는 과정은 나에게 치유의 시간이 된다.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과 글을 쓰는 시간만이 오롯이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내 글에서 주저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 미워하거나 회의적인 시선이 담긴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불행하다거나 부정적인 시선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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