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을 품은 지 벌써 대략 4개월. 죽을 것 같았던 입덧도 조금씩 나아지고 병원에서 뱃속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내가 정말 임신을 했고 엄마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실감하고 있다. 아이를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원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선택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이 없었다. 아이를 꼭 낳아야 하는 것일까, 아닐까에 대해서도 흑백논리처럼 하나를 선택하기 주저스러웠다. 조금씩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이에 가까워진다는 점이 조급한 마음을 들게 했고,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지 흘러간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어떻게든 내가 해보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한 후에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도 이쯤이면 되었다 싶을 정도의 마음가짐은 생기지 않았고, 더 못해본 것들에 허기짐만 커질 뿐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완벽한 마음의 준비는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난 먼 훗날 아주 나이가 많이 든 노인이 되어서도 뭔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 하고 경험하길 원하면서 살아갈 것 같다. 그냥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인 것이지, 이제 경험을 그만해도 충분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게 또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어쨌든 그렇게 계획도 무계획도 아닌 채로 아이를 갖게 되었다.
입덧에 허덕이고 있을 때였다. 사촌언니에게서 육아책을 선물 받았다. 임신 축하와 함께 아이를 낳으면 하루하루가 전쟁이니 미리 봐 두어야 한다는 조언도 받았다. 그래, 아이를 키우려면 필요하겠지. 정신을 차리게 되면서 한 장씩 읽기 시작했다. 내가 육아책을 읽다니. 그것조차 낯설게 느끼며 책을 펼쳤다. 참고로 내가 육아책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은 그저 아이를 기르는데 꿀팁을 얻기 위해 필요에 의해 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책이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모든 마음의 편견을 내려놓고 읽기 시작했다. 이제 나에게 당면한 과제인 것은 분명하니까. 소아정신과 전문의이자 뇌과학을 연구하는 저자가 쓴 책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교육을 해야 한다'라는 관점보다는 '인간은 이런 단계로 발달한다'라는 식으로 아이의 발달 상태를 명확히 알려주고, 인간의 인지능력이나 정서안정에 대해 아주 원초적인 것에서부터 설명하고 있었다.
인간의 뇌는 아기 때부터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타고난 기질과 합쳐져 미래에 어떤 어른으로 자라나는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아기의 뇌세포인 뉴런은 임신 6개월부터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는 생후 8개월에서 2세 사이에 절정을 이루며 3세에서 5세 사이를 정점으로 점차 낮아진다. 외부 자극을 통해 형성되는 시냅스의 수가 많을수록 신경회로가 많아져 똑똑해지고 그 시기에 시냅스를 형성하지 못한 신경세포는 사라진다.
여기서 똑똑한 아이가 된다는 것은 사고력, 이해력이 높아진다는 말은 맞지만, 그것이 학업성적으로 직결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인생에서는 공부 말고도 풀어야 할 과제가 많고, 때로는 지혜가 지식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니까. 인생을 똑똑하게 잘 살아가는 아이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더 적합할 듯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성급한 조기교육 같은 것들이 아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많이 웃어주고 다양한 감각을 자극시켜주는 유대감 형성과 적기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어쩌면 뻔하게 알고 있었던 내용들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것이 뭔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가 한 인간의 탄생을 처음부터 지켜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하는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가 그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느낌 말이다. 아주 경이롭고 소중하지만, 동시에 겁이 나고 무서워지기도 한다. 불규칙적인 생활과 갈팡질팡하는 감정 기복,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못한 내 태도와 표정들 같은 내가 가지고 있든 부족한 나의 내면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 해도 완벽해질 수는 없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도 않는다. 예전에 남편이 '너 플랜맨이라는 영화 본 적 있어? 너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정도로 모든 것을 계획에 의지하며 살았고 그것이 완벽을 가져다줄 거라고 착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꽤 길게. 오히려 그것들이 나를 가두고 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나는 프리랜서를 하며 이런저런 시도들을 하면서 아주 느리게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과 해보고 싶은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 그게 어떤 나를 만들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쩌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사회적 신분이 '엄마'라는 편견으로 덧씌워진다는 불편한 부담감과 '나'라는 사람의 중심이 사라진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안간힘을 써서 피하기보다는 좀 흘러가는 대로 두기도 하고 새롭게 살게 될 내 삶에 기대도 해보면서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본다는 생각으로 나의 현실을 받아들여 보고 싶다. 누군가는 '낳아서 키워봐, 그런 소리가 나오나.'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낳기도 전에 불행해하고 싶지는 않다. 벌써부터 나를 내가 스스로 없애버리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 또 다른 영감이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이런 감정과 생각들을 이곳에 꾸준히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나에게 '엄마'라는 호칭을 처음 쓴 사람은 산부인과 원장님이었다. 모든 임산부를 그렇게 부르시는 듯하다. '엄마, 오늘부터는 음식 조절하셔야 하고요.'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다. 응대용일 수도 있지만, 조금씩 엄마가 되어가는 것에 익숙해지게 해주는 그 말이 다정하게 느껴지고 위로가 될 때도 있다. 처음엔 내 뱃속에 진짜 누가 있는 게 맞을까 싶었고 태담을 한다는 것도 어색했다. 일단, 오글거렸다. 오글거리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 말이지. 그런데, 초음파로 아기가 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확인하고 조금씩 태동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나도 내가 엄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고 있다.
"모하고 있어. 엄마 목소리 들리니."
라는 생경한 말을 나 스스로 하고 있다. 가끔 남편이 서운하게 할 때면 편을 나눠 '우리 둘에게 이러지 마'라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지금의 나는 정말 내가 아닌 우리인 거니까.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봤는데,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지금처럼 끊임없이 나를 찾으며 나다운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도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는 것처럼, 아이도 자기 다운 모습을 스스로 잘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 조차도 완벽하지 않은 인간인데 내가 무어라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쉽지 않겠지.
그래도. 그렇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