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다면 넌덜머리가 날 만큼 지겨운 일들이기도 했고, 낯설다면 어느 누구도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기도 했다. 다시 그렇게 일할 수 있냐고 누군가 묻는 다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답하겠지만, 그래 놓고도 매번 그 출장길에 올랐던 건 다름 아닌 나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를 가장 바삐 움직이게 만든 일이었기에.
그 회사는 내가 원래 2년 반 정도 직장으로 다녔던 회사다. 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일들과 숨 막히는 일정, 불안정한 조직구조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20대 중후반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우리 팀이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해체되는 걸 보고 얼마 후 내 발로 그 회사를 무작정 나왔었다. 그리고 남은 퇴직금을 정산받기까지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정들을 겪고 인연을 끊은 회사. 뭐, 그다지 좋게 끝을 맺은 것은 아니었기에 평생 다시 볼 일 없겠지 싶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회사에 같이 다녔던 선배 J와 함께 프리랜서로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시간은 정말 약인 건가. 약인 척 나를 다시 늪에 끌어들이는 덫인 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일을 시작했다. 각자의 필요에 의해서. 사장님은 더도 덜도 아닌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고, 나도 더 이상 감정노동이나 불필요한 야근 없이 딱 일을 필요로 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그 일을 다시 시작했다.
프로젝트 단위로 계약을 했는데, 보통은 출장을 다녀와서 시장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문서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말로 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짧게는 3박 4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소요되는 출장은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이라고 할 수 있었고 돌아와서 작업해야 할 문서는 약 1-200페이지에 해당하는 파워포인트 파일 3-4개 정도의 분량이었다. 회사에 출퇴근하지 않는 다고 해서 여유롭게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 동안 인간이 버텨낼 수 있는 체력의 한계는 무엇인가를 실험당하는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 패턴은 대략 이러했다.
아직은 바깥이 어두컴컴한 새벽, 캐리어를 끌고 집 밖을 나선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를 타도 좀처럼 아침은 오지 않는다. 한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눈이라도 붙여두고 싶지만 공항 가는 길은 항상 잠이 오질 않는다. 여행길에 설레어서 잠이 오지 않는 것과는 비슷한 듯 다르게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다가올 일정이 두렵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해보자는 다짐 비스무리한 것도 하면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로 공항에 도착한다. 그때쯤 날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무조건 첫 비행기다. 도착하자마자 하루를 꽉 채워 일하기 위함인데, 출장 내내 나를 괴롭히는 피곤의 원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비행기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나를 다른 나라, 다른 도시로 데려다 놓는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어놓고 바로 나와 시장조사를 시작한다. 보통 첫날은 오랜만에 백화점을 둘러보면서 문서의 방향을 어떤 식으로 잡을지 의논하고 탐색하는 시간으로 보낸다. 시장조사를 하고 차를 타고 이동을 하고 다시 시장조사를 반복한다. 하루에 평균적으로 세네 곳을 둘러본다. 그리고 그 세네 곳이라는 곳의 규모는 매우 크고 방대해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돌아다녀도 부족할 정도다.
늦은 저녁을 먹는다. 대부분 주변의 적당한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그나마 식사를 하는 시간이 쉴 수 있는 시간이지만, 피곤이 몰려와 입맛도 없을뿐더러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저녁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항상 식당에 앉으면 '얼른 대충 먹고 숙소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산해진미도 다 부질없게 느껴지는 타이밍이다. 언제나 가장 무난한 메뉴와 채소 종류를 선택하고 최대한 대세를 따른다.
숙소에 돌아온다고 해서 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자료를 정리하거나 선배 J와 문서를 어떻게 작성할 것인지 의논한다. 출장이 끝나고 문서작업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굳이 출장 때부터 무리하게 이런 일들을 하는 이유는 출장 마지막 길에 클라이언트에게 브리핑을 해야 하는 스케줄들이 꽤 자주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한 논의와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매번 보여주기 식 브리핑을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걸 안 하는 게 이상한 사람이 된다. 마치 책임감 없이 출장 온 사람으로 몰아세워지는 냉랭한 분위기가 흐른다. 약간의 반항이나 게으름도 용납되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을 떠안게 된 것처럼 무사히 일정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의무는 항상 급작스럽게 그 자리에서 억지로 주어지고야 만다.
그렇게 억지로 준비한 자료들을 토대로 한국에 돌아와 끊임없이 재수정과 추가를 반복해 방대한 양의 최종 자료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성공과 그다음 계약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지만, 나에게 그런 것까지 결정할 권한이 없고 그런 의견들은 종종 묵살되곤 했기에 묵묵히 고된 일정들을 수행할 뿐이다.
다음 날도 역시 첫 비행기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한다. 보통 한 도시에서 짧으면 하루, 길면 이틀의 시간을 보낸다. 비행기를 매일 타는 일도 고역이다. 사람이 비행기의 압력을 그렇게 자주 경험하면, 얼마나 체력이 너덜너덜해지고 피폐해질 수 있는지 몸소 깨달았다. 이미 시장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정신이 나가버리는데, 괜찮은 척 다시 일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고통의 시작.
이틀이 삼일이 되고 사일이 되면 약간의 우울감과 함께 회의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얼마나 대단한 일 하겠다고 얼마나 벌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나 스스로를 원망한다. 내가 받는 돈이 노동 강도에 비해 너무 적다고 느껴지고 어딘가 모르게 억울해지기도 한다. 집에 가려면 며칠이나 남았는지 몇 시간이나 남았는지 부질없이 세고 또 센다. 그리고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대부분 저녁이나 밤이다. 다음날 아침에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가 많다.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보거나 맥주라도 한 잔 하면서 출장의 피곤을 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그럴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내식은 손도 못 대고 눈을 뜨면 두들겨 맞은 것처럼 무거운 어깨와 함께 어느새 공항에 도착한 나를 발견한다.
집에 돌아오면 2-3일 정도는 아무것도 못하고 꼼짝 않고 누워있게 된다. 그야말로 병든 닭처럼. 피부는 상할 대로 상해있고 구내염에 시달려 알보칠 약을 달고 살기도 한다. 한 번은 여독을 풀겠다고 저녁에 찜질방에 갔는데, 그대로 바닥에서 잠들어 다음날 아침까지 못 일어났던 기억도 있다.
지난날들을 다시 떠올려봐도 내가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는지 모르겠다. 마치 나에게 없었던 일처럼 꿈같다. 악몽 같은 꿈.
극한의 체력을 필요로 하는 출장이기에 출장 준비는 언제나 당분 가득한 간식으로 시작한다. 원래 난 단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젤리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하리보 마니아가 되었다. 하리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걷다 지칠 때 가방에서 꺼내 먹기도 하고 이동하는 차에서 영혼 없이 하리보를 씹어댈 때도 있다. 그렇게 좋아하게 된 하리보는 이제 평소에도 즐겨먹는 간식이 되어버렸다.
호텔에서 아침저녁으로 마시기 위해 드립백 원두커피도 넉넉히 준비해 간다. 워낙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 때문에 호텔 조식을 먹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 조식으로 나오는 커피는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경우가 많다. 카페인은 나를 견디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이기에 매번 내가 좋아하는 카페의 드립백을 사서 미리 챙기곤 한다. 시장 조사하다 지칠 땐 근처 스타벅스를 이용한다. 스타벅스가 없었으면 얼마나 더 괴로운 출장이 되었을까 싶다. 잠시 앉아서 쉴 수도 있고 당을 충전하는 타이밍이 되어주기도 한다. 평소엔 아메리카노만 마시는데, 출장길에는 아메리카노도 소용없다. 더 달고 강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고소한 라떼나 달달한 콜드폼콜드브루를 주문한다.
그 밖에도 각종 과자와 껌, 초콜릿, 팩, 정신을 맑게 해주는 롤타입의 오일 등 여러 가지를 챙긴다. 지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고 견뎌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들이 내 고통을 모두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없으면 힘들 만큼의 작은 위로는 되어 준다.
스스로 여러 번의 출장길에 오르면서도 이 모든 게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밖에 일할 수 없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남들의 출장은 가끔 관광도 하고 쉬기도 하고 또 폼 나보이던데, 왜 나의 출장은 이렇게 고통뿐인 걸까 싶기도 했다.
회사라는 울타리를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악습들이 출장길에 오르면 다시 반복되곤 했다. 나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어디까지 끊어내고 어떤 길을 새로 모색해야 할까. 출장은 늘 그것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지금에 와서 정말 다행인 건 이 모든 일이 지난 일이라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