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때까지 된 게 아닌

by 흔적




모든 일이 될 때까지는 된 게 아니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지만, 그 불확실성은 나를 가장 마음 졸이게 했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계약의 여부가 아니라, 일하는 과정이나 관계에 있어서 까지도 나를 자주 흔들어 놓곤 했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닐 때도 프로젝트가 무산되는 경우는 많았다. 미팅과 제안서에서 쏟은 정성이 무색할 만큼 클라이언트 측에서 연락이 오지 않은 적도 있고, 클라이언트사의 대규모 조직개편 때문에 프로젝트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던 적도 있다. 그런 건 업무에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고 꽤 기운 빠지는 일인 건 분명했지만, 견디기 힘든 정도의 답답함이나 실망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 홀로 외딴섬에서 살아가야 하는 프리랜서의 입장이 되고 나니, '될 때까지 된 게 아닌 것'들은 나를 시시때때로 괴롭혔다.










간 보기



외주로 고용되어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될 것 같았던 작업들은 생각보다 꽤 많은 간 보기의 상황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내가 간 보는 경우는 안타깝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간 보는 사람들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불필요한 안부를 먼저 건네거나 시간이 있느냐는 식으로 모호한 연락을 취해오는 경우들이 많았다. 먼저 본론을 꺼내는 것이 어색하고 민망해서 일까, 아니면 내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상황을 보고 일을 맡기려는 심산 때문일까. 사무실 근처에서 잠깐 만나자거나, 밥을 먹자거나 하는 식이다. 물론, 모두가 간만 보는 건 아니다. 정확한 용건으로 그 말을 꺼내는 사람도 있고 정말 간을 보기 위해 툭 던지듯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그 만나자는 말 한마디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있을지 불명확할지라도 나는 일단 나가는 편이다.


돌이켜 보면, 참 어색한 식사자리도 많았던 것 같다. 그동안 어떤 일을 하면서 지냈는지 물어보는 경우도 있지만, 쓸데없는 가십거리를 종종 화두에 올려놓기도 하고 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기혼자인 나의 경우에는 결혼 생활은 어떠냐는 둥, 남편은 무슨 일을 하냐는 둥, 아이 계획은 없냐는 식의 질문도 은근히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내 남편이 무슨 일을 하건 말건 뭔 상관이람.


어쨌든 의미를 알 수 없는 식사자리일지라도 어떤 일을 어떻게 제안할지 모르기에 나는 열심히 밥을 먹고 묻는 질문에 성실히 답하며 꽤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을의 입장이란 이런 건가. 갑을 관계는 회사 안에 있을 때만 형성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어떤 상황이건 갑을이 존재한다.










"곧"



회사마다 프로젝트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막상 미팅을 하고 보니 내가 적합한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될 수도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일이 무산되어도 약간의 짜증이 날뿐 대부분의 간 보기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나 역시 어느 정도의 간 보기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미치게 하는 건 바로 불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 확실한 것 같으면서도 애매한 것 같은 태도를 취하는 "곧"이라는 표현이다. 알고 보니 구두로도 명확하게 오가지 않은 일에 대해 마치 보험처럼 한 명을 찜해두기 위해 미팅을 하고 내 스케줄을 확인했던 경우가 있었다. 오간 시간과 함께 먹은 밥이 아깝게 느껴질 만큼 허무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싶기도 했고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것까지도 자주 함께 일하는 관계가 아닐 경우엔 그냥 해프닝인 셈 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사회에서 만난 사이 안에서도 무수히 많은 가깝고 멀고 친하고 안 친하고 사적이고 아닌 관계들이 경계 없이 존재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명확히 할 것들은 명확히 해야만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을 당장 시작할 것처럼 다짐을 받는다거나 과도한 기대를 주는 일은 금물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것들이 쌓이면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오해가 얽히고설켜 신뢰를 무너뜨린다. 특히, 금전적인 부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곧 줄게."

"곧 시작할 건데 같이 할래?"



빌려간 책 준다는 말이 아니다. 학교 과제 같이 하자는 제안도 아니다. 내 시간과 노동력을 써서 돈을 받는 일에 이런 말은 안 된다는 명확한 부정의 말보다 나를 더 화나고 실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거지만, 일을 시작할 때 스케줄과 결제일, 결제 방식, 근무 조건, 계약서 작성 여부를 대놓고 꼼꼼히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얼마나 잘 알고 있는 사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처음엔 이런 걸 대놓고 물어본다는 것이 약간은 민망하기도 했지만(먼저 물어볼 경우 마치 유난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상대도 있었기에), 이젠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누가 봐도 안될 것 같은 일에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주는 경우엔 나도 적당히 "아 네, 되면 좋죠. 기다리고 있을게요."라는 식의 영혼 없는 영업용 멘트를 날리고 웃으면서 자리를 뜬다.


어차피, 될 때까지 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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