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을의 입장이 되어 피하지 못하고 들을 수밖에 없었던 말들이 있다.
생각해보니 이건 프리랜서라서가 아니라, 조직 안에 있을 때나 바깥에서나 동일하게 들었던 말이다. 계속 들어왔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더 화가 났던 이유는 조금은 내 권리를 찾고 싶다는 생각과 일한 만큼 돈을 받아야 한다는 수지타산의 욕구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만큼 내게 결핍된 건 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감정적 피해의식이었다.
피해의식을 흔히들 개인의 자격지심이나 자존감의 문제로 떠넘기곤 하지만, 애초에 왜 그런 피해의식이 생겨났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다 보면 결코 나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다치지 않기로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태도로 표출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조금도 마음 상하지 않고 괜찮을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좀 어딘가 이상한 사람인 것이 아닐까.
기분이 붕 뜨는 어느 화창한 봄날의 주말이었다. 아주 잠깐의 전화 한 통으로 내 감정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내가 보낸 자료를 받아본 후 갑의 피드백이었다. 이번엔 왜 그랬냐니. 나의 스케줄이나 컨디션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기에 나는 이전과 변함없이 작업을 했고 자료를 발송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쉽다. 쓸 수 있는 게 별로 없네."
그래, 그 말은 정말일 수도 있다. 어차피 자료에 대한 쓸모는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기에 내가 더 일을 잘하는 방법은 그의 취향과 성향을 잘 아는 것에 있었다. 어쨌든, 나는 그에게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며 일하고 있었다. 여러 번의 작업에 어떤 피드백도 하지 않던 그가 갑자기 마지막 자료를 받아본 후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솔직히 예감하고는 있었다. 그다음에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나올 거라는 것을.
"이것 좀 추가해주고 이것 좀 몇 개만 더 해주면 좋을 거 같아."
그때의 내 계약 상태는 한 번의 자료 발송마다 건별로 금액이 책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을 추가하려면 그에 따르는 금액을 지불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그 모든 게 나의 탓이 되면 그는 아무런 책임 없이 나에게 한 번 더 자료를 요구할 수 있다.
이렇게 상사로서 혹은 갑으로서 을을 책망하는 것은 꽤나 효과적이다. 특히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을수록 상대를 반성하게 하고 끝없는 열정으로 그의 시간을 헌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좀 달라진 것 같기도 하지만, 나의 20대에는 확실히 그랬다. 약인지 독인지도 모를 것들을 그대로 다 받아들였던 시간들이 있었다. 더구나, 갑의 나이와 경력이라는 것은 또 아주 무시할 것은 못 되기에 많은 이들이 스스로 을이 되어 그에게 열정페이를 받았다. 자신이 휘두른 무형의 폭력이 그에게는 아주 효과 좋은 명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람을 키우지는 않으면서 왜 자꾸 을들이 오래 붙어있지 못하고 자주 드나드는 것인지 항상 의문을 품곤 했다. 그저 요즘애들이 일에 열정이 없는 탓을 할 뿐이다. 내가 정말 무섭고 소름 끼친다고 느낀 지점은 갑들이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잘못된 걸 알고도 사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만큼은 한없이 관대한 진정성의 필터를 씌운다. 진심으로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하고 일을 책임감 있게 하지 않는 후배들이 답답한 거고 일을 시킨 사람에게 주어야 할 돈 보다 내 회사 사정이 더 중차대한 일인 것이다.
어릴 때는 분명 알면서 하는 거짓말이 더 나쁜 거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사회에 나와보니 그 말이 진리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이 어디까지 알고 몰랐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생각과 태도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일을 추가해달라는 예감했던 그 연락에 반박했다. 여태껏 모든 요구에 맞춰서 일을 진행해왔는데, 어떤 부분이 잘못된 거냐고. 그렇다고 딱히 명확한 방향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갑자기 그는 밀당의 기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괜찮았고 저것도 좋았다고. 수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나리오였다. 사실 나도 한 번쯤은 더 부탁한다고 해도 거절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는데, 굳이 그렇게 깎아내리면서 명분을 찾았어야만 했을까.
결론은 한 번의 작업을 무료로 더 해줬다는 것.
이 말은 지금 내가 가장 기피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언뜻 보면 매우 그럴싸한 말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 치고 그리 프로다운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게 함정이다. 제대로 된 프로들은 그냥 직접 보여준다. 자신이 일하는 태도와 과정, 결과물을 통해. 오히려 프로다움이 결여되어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 그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이 말이 자주 쓰이는 것을 목격했다. 조금 더 자신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기를 원할 때, 을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을 때 약간의 당근스러운 채찍으로 이렇게 말한다. 프로답게 하자고. 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적절한 대우나 결제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그 누구보다 주먹구구식의 아마추어적 면모를 드러낸다.
질려버린 나는 다짐하곤 한다. 저런 말 쓰지 말자고.
상사는 언니가 아니다. 실제로 사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일할 때 이런 식의 호칭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일하면서 유대감이나 동료애 그 비슷한 걸 공유한 상대가 하는 말이라면 그럭저럭 좋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들어본 '언니'라는 표현은 관계가 가까워져서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심리적 거리감을 더 멀게 만들어버렸다.
갑들은 을이 일을 그만두려고 하면 타이르기 위해, 을의 진로에 간섭하기 위해,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뜻하는 바 대로 상황을 이끌기 위해 상사로서가 아닌 언니로서 조언을 시전 하며 따뜻한 눈빛을 보낸다. 그럴수록 상대의 마음이 더 냉랭하게 식어버리는 줄도 모르고.
모든 일의 탓을 갑에게 돌려버리고 무책임한 을의 태도마저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지적 을의 시점으로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여태껏 관성처럼 으레 그래왔다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