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정함을 오래 쓰던 사람에 대하여
늘 같이 점심을 먹던 친구가 말했다.
“미안, 나 점심 돈 없어서 못 먹어.”
“무슨 일 있어?”
울상 지은 친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번 달 돈이 다 떨어졌어.
한 달 동안 라면 하나 쪼개서 먹어야 돼.”
그 말이 너무 적나라해서,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뭘 묻는 것도 이상했고, 그냥 지갑을 꺼냈다.
내 하루치 밥값이었지만,
그 애가 괜찮아지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원래,
그런 말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었다.
다정한 말 한마디에 내 사정을 접고
지갑부터 여는 버릇이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나는 그날을 그냥,
내가 혼자 만든 위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우린 점심마다 만났다.
나는 친구에게 점심을 사줬다.
내가 그렇게 부유했던 건 아니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오늘도 안 굶었다.”
나는 친구의 고마움이 진심이라 좋았고,
돈보다 중요한 관계를 쌓는 거라 여겼다.
“나 사실 집에서 차별받아.
엄마가 남동생만 지원해줘서 힘들었거든.
근데 네가 있어서 너무 기뻐.”
특히 친구가 힘든 가정사를 말했을 땐,
내가 믿음직한 사람같아 기뻤고,
그 애가 돈 없는 이유를 어림짐작했다.
그 사정이 진심이라 믿었다.
그 사정 때문에 그 애가 더 애틋해졌다.
그래서 빠져나가는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억지로 파헤치고 싶지도 않았고,
짐작되는 무게에 말 없이 다정해지고 싶었다.
그 애의 웃음조차, 나는 진심처럼 믿었다.
하지만 어느 날,
다른 친구에게서 우연히 이야기를 들었다.
“걔가 돈이 없다고?
이번 여름에 유럽 여행 간다던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놓친 게 아니라
그 애가 생략한 사실이었다는 걸 느꼈다.
우연일 수 있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건 그 애의 선택이었다.
“그 애는 내 다정함을 필요로 한 게 아니었다.
그냥, 편리했을 뿐이다.”
그 순간,
내가 믿은 다정함까지 허망해졌다.
그 애는 내게 말하지 못했다.
처음엔 의도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밥을 사주는 나에게
더는 말할 수 없게 되었던 거다.
어쩌면, 그걸 말하면 내가 실망하거나
다시 사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가장 좋은 해석일 뿐이다.
그 애가 내게 조금이라도 미안했다면,
내 다정함을 그렇게 오래 쓰지는 않았을 거다.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이 그 애의 선택이었음을 알았다.
그 애와 주고받던 감정이 기만일지 모른단 배신감보다,
내 진심이 그렇게 가볍게 쓰였다는 게 더 서운했다.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해줬던
내 선의까지 부정당한 듯했다.
그래서 나는 따지지 않았다.
다시 먼저 점심을 권하지도 않았다.
“유럽 여행 간다면서. 재밌겠다.”
그 말로 충분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도
조금 더 다정했어야 했다.
내 다정함이 꼭 아무에게나 향할 필요는 없었다.
그건 필요했던 게 아니라,
그저 습관처럼 꺼내온 감정이었으니까.
나는 여전히 다정하고 싶다.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그 다정함이 나에게도 다정해야 한다는 걸
이번엔 조용히 배웠다.
한동안 나는,
내 진심에게도 미안했으니까.
이제는,
다정함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다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 다정함은, 누구보다 나에게 먼저 머물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