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마주한 어떤 현실감
4년 전에 잠깐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있었다. 내가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직전이었고, 업종까지 바꿔서 취업을 하느라 몸과 마음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던 시기였다. 서울에서 판교까지 왕복 세 시간이 걸렸고,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회사에서는 매일 정신적으로 깨졌다.
그때 이 친구는 박사 과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던 만큼 서운함도 컸다. 연락이 조금만 뜸해져도 왜 그러냐고 따졌으며, 피곤해서 목이 쉴 정도로 새벽까지 통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회사 컴퓨터에 카톡이 안 깔려 있어서 핸드폰을 봐야 연락이 되는데 핸드폰 보면 왜 보냐고 혼난다 설명해도 그때 뿐이었다. 매일 화를 내고 설명하고의 반복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리가 서로 최악의 타이밍에 만나서 최악의 방식으로 버티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3~4개월 정도로 짧게 끝났다.
그러다 올해,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2월에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 문자도 오고 전화도 왔지만 보지 않았다. 3월에 헤어지고, 4월에는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만나기로 했지만 당일에 그가 바쁘다는 이유로 약속이 취소됐다. 8월에는 다시 연락이 와서 만났는데,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고 나서야 “사실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바로 돌아섰다.
그리고 10월, 또 연락이 왔다. 헤어졌다고. 잠깐 보자고.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 만나지 않았겠지만, 30대 초반에 잠깐 사귀었던 그 시절의 미숙함도 떠올랐고,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애 상대를 만나기 정말 어렵다는 것도 문제였고.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내 기억 속 그는 전형적인 불안형이었다. 관심, 확인, 연락… 무엇이든 과할 정도로 요구하던 사람. 그런데 지금의 그는 정반대였다. 완전한 회피형이었다. 매주 만나자고 하고, 내가 다른 일정이 있으면 질투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만나지 않는 평일은 연락이 전혀 없었고, 오늘 뭘 하는지, 연락을 보내도 5시간 넘게 묵묵부답.. 내가 일정있는건 싫어하면서도 본인 일정은 알려주지 않았다. 만나서는 괜찮게 굴다가도 이후에는 다시 잠수 모드였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4번째로 만나기 전, 최소한의 예의와 태도는 지켜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바빠도 알려줄 건 알려야 하고, 상대를 고려하는 기본적인 선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돌아온 말은 이것이었다.
“우리 그런거 정해놓고 만나는 거였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당황스러웠고, 되물었다.
“그럼 왜 매 주말마다 보자고 한 거야? 친구면 굳이 그렇게 주기 맞춰서 만날 필요 없잖아. 전 남친이면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건 솔직히 부담스럽고… 난 우리가 다시 알아가는 사이인 줄 알았어.”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건 이 말이었다.
“그런 연락 같은건 맞출 수 있는데 난 솔직히 네가 더 걱정이야. 네가 할 수 있을지. 지금은 네 기준만 고집하는 거잖아.”
“그러면 넌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말해줘”
“일요일에 만나서 설명하면 안될까?“
“설명을 해줘야 더 만날지 말지 알수 있을 거 같아.”
“왜 네 기준만 고집해?”
화가 났다. 나를 존중하려는 생각 없이 그냥 만나는 거구나. 지나친 요구를 한 것도 아니었고, 최소한의 배려와 선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과거의 어떤 기억들이 좋게 남아 있어서 전 사람이 그리울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그 사람’은 사실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바뀌고, 상황도 바뀌고, 관계 역시 흐름을 타면서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된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 더 좋아지는 변화를 겪었을 것이고, 나처럼 어떤 관계는 시간이 흐르며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이미 한 번 신뢰가 무너진 사건이 있었다는 점이다. 한 번 금이 간 신뢰를 다시 붙이려면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은 반드시 쌍방이어야 했다. 어느 한쪽만 애달프게 애써서는 절대 복원이 되지 않는 종류의 틈이었다.
나는 사실 안다. 이런 기준, 저런 조건을 세우면 누군가를 다시 만나기가 정말 어렵다는 걸. 그래서 한 달 가까이 고민했다. 그래도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결론이 났고, 결국 이 관계는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 과정인 오늘 참 많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괜히 다시 만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의 끝에 있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결혼을 생각하고 양가 인사를 드렸던 사람. 그 사람은 노력하지 않아도 가끔씩 떠오른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지금의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닐 것이다. 기억 속 인물은 대체로 가장 좋게 남은 순간으로 고정되기 때문에, 현실의 시간을 통과한 후의 모습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건, 나의 현재에 집중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간 사람들에게 다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고, 지금의 나에게 맞는 관계와 리듬을 찾아가는 것. 아마 이 경험은 그런 방향으로 나를 돌려놓기 위한 하나의 확인 과정이었을 것이다.